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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Mar 08. 2020

[Preview]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그림책은 어린이가 호기심으로 방문하는 첫 번째 갤러리입니다.

위의 문장은 한 동화책 전문 출판사의 핵심 모토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어린 시절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부모님이 말하길, 어렸을 때 나와 동생들은 책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 우리를 위해 부모님은 적어도 동화책을 사는 것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덕에 집에는 세종출판사에서 출판한 60권짜리 미네르바 동화책 전집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일본의 동화 작가 이와무라 카즈오가 쓴 < 열네 마리 생쥐 가족 > 시리즈다. 말 그대로 열네 마리의 생쥐 대가족이 이사를 가고, 빨래를 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는 등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내용이다. 어린이들이 읽는 책답게 글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동화책을 어디 글로 읽던가. 그림을 보지. 거기 있던 따스한 그림들이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나는 ‘가을’을 생각하면 동화책 속 생쥐가족이 이사를 하기 위해 지나온 산이 떠오른다. 여담으로 이런 기억 덕분인지 그때는 세상의 모든 생쥐가 귀여운 줄 알았다. 마침 그때는 <방가방가 햄토리>라는 햄스터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도 유행했었다. 물론 그 환상은 시골집에서 만난 진짜 생쥐로 인해 산산이 깨졌지만 말이다.


여하튼 동화책의 그림이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긋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던 기억보다 조그만 손으로 책장을 넘겨 짚어가며 책을 읽던 기억이 더 정겹다. 하지만 커가면서 자연스레 동화책을 잊고 지냈다. 어쩔 수 없었다. 참고서, 교과서, 필독도서 등 내게는 읽어야 했던 책들이 산더미였으니까.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이제 나는 어른이니까. 애들이나 읽는 동화책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그렇게 자연스레 동화책과 거기에 얽힌 추억들은 삶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동화책을 다시 찾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우연히 SNS에서 이규영 작가의 작품들을 접한 뒤였다. 이규영 작가는 아내와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재미있었던 일이나 행복했던 추억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아무래도 그때 내가 좀 외로웠나 보다. 아니면 전 여자친구와의 추억에 아직 허덕이고 있었거나. 여하튼 오랜만에 만난 그림들은 여전히 따스했다. 열네 마리의 생쥐들은 여전히 거기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호박을 키우고, 빨래를 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일러스트(삽화)’란 무엇인가. 보통은 동화책 등에서 삽입되는 그림을 떠올린다. 사전에는 서적, 잡지, 신문, 광고 등에서 문장 내용을 보충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첨부하는 그림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다. 사실 일러스트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길다. 전문가들은 최초의 일러스트를 원시인들이 남긴 동굴의 벽화로 본다. 이외에도 동아시아에서는 8세기 이래로 활자를 나무판에 쓴 전통적인 방식에 손으로 그려 넣은 삽화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기술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기법을 연구하며 발전을 해오다가 출판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9세기 즈음부터 본격적인 황금기를 맞이한다. 잡지사들은 글과 함께 일러스트가 삽입되었을 때 판매 부수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잡지 판매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대중은 일러스트가 삽입된 잡지에 대해 신뢰와 애정을 보냈고, 이는 오브리 비어즐리, 무스타브 도레, 비트릭스 포터 같은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한편 대중들이 보내는 애정과는 무관하게 예술의 영역에서 일러스트가 상대적으로 하대를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일러스트의 태생적인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던 일반 회화와 달리 일러스트는 인쇄매체에서 문장 내용을 보충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첨부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기능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예술성과 독창성이 중요시되던 일반 회화와 달리 일러스트는 상대적으로 상업성이나 대중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출판산업의 영향으로 일러스트는 기계에 의한 무한한 복제와 재생산이 가능하다. 그로 인해 일반 회화에 비해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오늘날 일러스트의 위상은 조금 다르다. 게임 등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일러스트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2차 저작물 등을 포함한 만화 시장의 급격한 성장으로 일러스트의 영향력이 크게 늘었다. 또한 SNS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만화나 동화책으로 인해 아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일러스트가 어른들에게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키덜트 문화, 개인의 만족을 중요시하는 소비 트렌드의 확산도 한몫을 한다. 이제 일러스트는 더 이상 인쇄매체의 보조 수단으로만 자리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세계 최대 규모의 일러스트 전시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고 한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2020년 2월 26일(목)부터 4월 23일(목)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 등 어른들을 위한 일러스트 원화 작품들과 그림책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9년 53회째를 맞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천여 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이 전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을 통해 최종 70여 명의 작가들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하고 작품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선정한 작품들의 전시는 실험적이고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 일러스트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로도 유명하다.


특히 서울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올해의 일러스트 작가들의 원화 300여 점들로 구성된 메인 전시와 함께 2018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의 우승자인 Vendi Vernic의 특별전,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작, 보림출판사의 그림책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를 선보인다고 한다.


2020년 2월 6일부터 4월 23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위 전시를 통해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76명의 순수하고 창의적인 작품들은 물론, 어린 시절의 추억과 일상의 낭만들을 만나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https://www.artinsight.co.kr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6679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bolognaillustrators.modoo.at/?link=e108dz1u (전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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