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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Jan 15. 2023

9화_고집의 성과

부제: 일관성

지난 12월 18일, 카타르 월드컵이 끝났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며 우리 세대의 월드컵이 이렇게 또 하나 지나간다. 이번 대회는 유독 이변과 사연이 많은 대회였다. 아르헨티나를 꺾은 사우디아라비아, 독일과 스페인을 꺾고 조 1위를 차지한 일본, 모로코의 4강 진출, 모드리치 등 한때는 최고라 불렸던 선수들의 라스트 댄스까지. 물론 메시의 우승 스토리도 빼놓을 순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이번 월드컵은 인상적이었다. 사상 두 번째로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회 시작 전만 하더라도 이번 대표팀에 대한 여론은 기대보다 우려가 많았다. 특히 감독인 파울루 벤투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2018 러시아 월드컵의 실패 이후, 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된 벤투는 후방 빌드업을 강조한 팀컬러와 전술로 빠르게 대표팀을 재편했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칠레, 에콰도르 등 강팀과의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8년 월드컵 당시 무기력하던 그 대표팀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월드컵 지역 예선도 역대 대회를 통틀어 가장 수월하게 통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처 - FIFA 월드컵


하지만 경기를 진행할수록 벤투 감독에 대한 비판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대부분은 그의 고집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첫 번째 문제는 그의 전술이 답답하고 유연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포메이션 변화의 폭도 적고, 포지션별 선수들에게 주어진 역할도 거의 비슷했다. 이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거나, 혹은 상대의 밀집수비로 공격 전개가 답답할 때 이를 전술적으로 타파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두 번째 문제는 기용하는 선수들의 라인업이 항상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선수단 구성에 거의 변화를 주지 않고, 설령 준다 하더라도 대부분 비슷한 스타일을 지닌 선수들을 기용하는 데 그쳤다. 이는 벤투가 선수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전술을 구사하기보단 이미 짜인 전술에 가장 적합한 선수들을 기용하는 스타일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훈련 시간이 제한적인 대표팀 특성상 감독의 스타일을 선수가 체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선발 라인업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이외에도 월드컵에선 아시아 무대와 달리 강팀들을 상대할 텐데 그들의 거센 압박과 공세 속에서 벤투 감독의 후방 빌드업이 통할 수 있겠냐는 의문도 있었다. 아시안컵과 동아시안컵에서 이러한 단점들을 그대로 노출하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것도 타격이 컸다. 아이슬란드, 코스타리카, 카메룬 등과 치렀던 마지막 평가전에서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손흥민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겹쳤다.


불안하게 시작한 월드컵이었다. 하지만 첫 경기를 치른 직후 여론은 달라졌다. 피파 랭킹 14위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값진 승점 1점을 얻어온 것이다. 가나전에선 비록 아쉽게 패배했으나 후반전에 2골을 따라가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기적적인 승리와 함께 사상 두 번째로 원정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출처 - 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리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감독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비판했던 벤투 감독의 고집 말이다. 


전술 변화가 적다는 건 선수들로 하여금 전술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덕분에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이해한 선수들은 상대의 거친 공세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또한 선수단 구성의 변화가 적다는 건 선수들 간 호흡을 끌어올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대표팀은 클럽팀과 다르게 호흡을 맞춰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 매번 누가 뽑힐지 장담하기도 어렵다. 허나 벤투 감독의 고집은 그 악조건을 극복 가능한 조건으로 치환시켰다. 4년간의 시간을 통해 클럽팀 못지않은 유기적인 호흡을 만들어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축구 협회는 끝까지 믿음을 보냈고, 4년이라는 충분한 시간 속에서 벤투 감독은 마침내 결과를 만들어 보였다. 벤투 감독의 고집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색깔이 되었다. 대표팀의 희미하던 축구 철학에 분명한 컨셉과 정체성을 입혀준 것이다. 그 결과, 강팀을 상대로도 대표팀은 당황하며 볼을 돌리는데 급급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며 자신들만의 축구를 펼쳤다. 바로 이것이 16강 진출보다 값진 이번 월드컵의 성과였다.



첫 화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성공하는 축구팀과 브랜드는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아이덴티티는 구성원을 하나로 끌어모으고, 사람들로 하여금 대상을 기억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그 자체로 심장, 혹은 엔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팀 입장에서는 공격적인 축구/수비적인 축구, 열정적인 축구/실리적인 축구 등으로 나눌 수 있고 브랜드 입장에서는 혁신, 상생, 행복, 휴머니즘 등으로 대표할 수 있다.


아이덴티티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다. 그렇기에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보편적인 가치를 어떻게 나만의 개성으로 바꾸냐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창의력보단 성실함의 영역이다. 우리가 말을 자주 바꾸거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듯 아이덴티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기발한 광고를 돌리더라도 꾸준함이 받혀주지 못한다면 아이덴티티는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하다.


일례로 지난해 10월에 출시된 애플의 아이패드 10세대는 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간 지켜 온 혁신의 원칙을 스스로 져버렸기 때문이다. 애플은 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중 하나다.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어제보다 한 발짝 더 인간을 편리하고 이롭게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 맥북 에어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퍼포먼스에만 놀란 게 아니었다. 서류 봉투에 담을 수도 있을 만큼 가볍고 얇은 노트북의 등장. 이러한 노트북과 함께라면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고, 자유롭게 영감을 펼칠 수 있다.


이번에 출시한 아이패스 10세대는 어떨까? 아이패드 10세대는 최근 출시된 다른 제품들과 달리 애플 펜슬 1세대를 지원했다. 문제는 아이패스 10세대의 충전단자가 USB-C라는 것이었다. 애플 펜슬 1세대의 충전 단자는 라이트닝이었다. 충전을 위해서는 별도의 어댑터를 연결해야 했다. 그렇다고 애플 펜슬 2세대처럼 무선 충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구속해 버린 것이었다. 이건 애플의 그동안 보여주었던 혁신이 아니었다. 결국 사람들은 아이패드 10세대를 외면하였다.



꾸준함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벤엔제리스’가 있다. 1977년 버몬트주에서 미국인 벤과 제리가 만든 이 회사는 국내에서는 생소할지 몰라도, 미국에서는 하겐다즈와 함께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브랜드 중 하나다(포브스 기준, 글로벌 아이스크림 판매량 순위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벤엔제리스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바로 아이스크림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아이스크림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둘, 아이스크림을 팔아 번 돈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실제로 벤엔제리스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ESG 활동으로 매우 유명하다. 일단 지역 친화적인 사업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벤엔제리스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우유 등의 원료를 버몬트주에서 조달하고 있다. ‘Caring Diary’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낙농업체를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무료로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기도 하고, 지역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덕분에 버몬트주에서 벤앤제리스의 인기는 매우 높다. 오죽하면 하겐다즈와 필스버리가 벤앤제리스를 견제하기 위해 유통 점주들을 협박하자 지역 주민들이 대신 나서서 항의할 정도였다.


또한 1989년부터 공정무역을 시작했고, 아이스크림의 원료인 우유와 계란 등에는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성장 촉진제 등을 일절 활용하지 않았다. 5:1룰을 도입하는 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했다(이때 말하는 5:1룰이란 벤앤제리스 내 최저 임금자와 최고 임금자의 임금 차이가 5배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렇듯 벤앤제리스는 소비자뿐만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생산 주체들의 행복까지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아이스크림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그린 것이다.


이외에도 벤앤제리스는 매년 이익의 7.5%를 기부하고, 1% FOR PEACE 같은 자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6년엔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Empower Mint’ 아이스크림을, 2019년엔 모든 유색인종에게 평등하도록 형사법 개정을 요구하며 ‘Justice Remix’d’ 아이스크림을 출시하는 등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벤앤제리스의 이러한 꾸준한 활동은 사람들로부터 하여금 브랜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 그 결과, 2019년엔 하겐다즈를 밀어내고 미국 아이스크림 시장에서 매출 1위를 차지했다. 


물론 벤앤제리스의 시간이 항상 반짝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아이스크림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무시무시하던 벤앤제리스의 기세도 타격을 입었다. 또한 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며 시작된 5:1룰이 오히려 역으로 관리자급 인원들의 이탈을 야기하면서 회사는 더욱 흔들렸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벤앤제리스의 유통을 대행하던 드라이어스가 독자적인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런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자체 유통망이 미국 동북부에만 몰려 있던 벤앤제리스에겐 뼈아픈 소식이었다.


결국 2000년, 벤앤제리스는 경영권을 유니레버에 매각하였다. 그동안 보여준 이야기를 생각하면 아쉬운 결말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벤앤제리스가 실패한 브랜드라는 건 아니다.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지키고자 하는 벤앤제리스의 의지는 매각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돈은 좀 덜 받아도 괜찮으니 유니레버 산하의 독립 브랜드로서 임직원들의 고용보장과 기부 등의 사회 공헌 활동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브랜드는 과거 주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가축에게 찍는 낙인으로부터 유래했다. 이 기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성공한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브랜드가 이야기하는 가치, 그들의 아이덴티티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이것을 보편성의 영역에서 개성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것은 결국 시간의 힘이다. 장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빗대어 보면 이해가 쉽다. 거기엔 왕도가 없다. 적당한 타협과 순간을 모면하는 잔머리만으로는 장인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걸작을 위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고집이야말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진짜 장인을 만든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성공하는 브랜드의 일곱 번째 비결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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