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너를 위한 글자'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가 오는 3월 31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공연한다. 2024년 시즌 1호 눈물을 탄생시켰던 작품이다. 그만큼 공연에 푹 빠졌다. 새해 시작부터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예감이 좋다.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 ‘마나롤라’에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이상한 발명품을 만드는 투리. 그런 그에게 옛 친구들인 캐롤과 도미니코가 나타나면서 평화롭고 조용하던 일상이 흔들린다. 한편 작가 지망생인 캐롤과 베스트셀러 작가인 도미니코는 ‘소설’을 공통점으로 가까워지고 이에 투리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투리는 캐롤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알게 되는데.
(1) 해설자로서의 음악
뮤지컬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역시 음악이다.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의외로 음악을 못 쓰는 작품들도 부지기수다. 아무리 좋은 선율도 서사를 실어 나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 음악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의 음악은 도구보단 해설자에 가깝다. 서사를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간다. 특히 피아노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례로 극중 피아노는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까지 선율로 만들어 표현한다. 덕분에 넘버와 넘버 사이에 음악이 끊길 일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우당탕탕 하는 소음이라도 틈입한다. 이 소리들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거대한 악보 위를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비롭게 넘실거리는 소리의 바다 위에서 서사와 연기는 마치 고래처럼 자유롭게, 가끔은 웅장하게 헤엄친다. 만약 관심이 있다면 피아노 소리를 따라서 이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2) 첫만남과 사랑에 빠졌을 때
물론 <너를 위한 글자>가 음악만 좋은 건 아니다. 스토리텔링 역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첫 만남’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그 중요한 순간들을 이야기는 소리와 빛을 통해 창의적으로, 동시에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투리와 캐롤의 만남은 캐롤이 투리의 옆집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됐다. 과묵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익숙지 않은 투리에게 갑작스러운 이웃의 출현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투리는 캐롤에게 본인은 귀가 예민하니 20투리 이하(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라고 한다)로 조용히 지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제 막 이사를 와 정리할 게 많은 캐롤에겐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녀의 소리가 자꾸만 투리의 집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결국 소음을 참다못한 투리는 캐롤의 이사를 도와야 했다. 그렇게 캐롤은 소리의 형태로 투리의 마음속에 들어섰다.
이러한 첫 만남은 이어진 장면에서 흥미롭게 변주된다. 작가 지망생인 캐롤과 베스트셀러 작가인 도미니코 사이엔 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마다 글짓기 모임을 가지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에 질투를 느낀 투리는 일부러 바로 옆에서 책의 구절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두 사람의 모임을 방해했다. 마냥 귀여운 장면처럼 보이지만 처음 투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장면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투리에게 타인의 소리는 대꾸가 필요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그래서 그는 매번 도미니코가 인사를 건넬 때마다 무시했다). 그랬던 그가 일부러 소음을 내며 캐롤과 도미니코의 주의를 끌었다. 캐롤과 도미니코가 그랬듯 투리 역시 소리를 통해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 시도한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장면은 어떠한가. 우연히 캐롤의 습작 노트를 주운 투리는 거기서 그녀가 보여주지 않았던 습작 한 편을 발견했다. 마치 빛의 아이처럼 항상 밝고 따스하기만 하던 그녀에게서 이토록 우울한 문체가 나올 줄이야. 이에 투리는 자신의 발명품 중 하나인 빛나는 원을 선물했다. 그 선물에 캐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극중 캐롤은 투리를 밤의 아이라고 불렀다. 어두운 줄만 알았던 밤의 아이는 자신의 빛을 꺼내 빛의 아이에게 선물했다. 그러자 빛의 아이는 다시 밝게 미소 지었고, 그 미소는 밤의 아이를 환하게 비췄다. 그렇게 밤의 아이, 투리는 사랑에 빠졌다.
(3) 첫사랑과 꿈의 상관 관계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어린 시절 첫사랑과 재회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위한 글자>가 가져다주는 울림은 특별하다. 이 첫사랑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닌 ‘첫’에 있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일 수 있었을까. 그건 각자가 서로의 꿈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투리와 도미니코는 각각 어린 시절 꿈이었던 발명가와 작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꿈을 이루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투리의 경우,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웃게 하기 위해 발명을 시작했다. 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은 이웃들과도 거리를 둔 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발명품을 만들며 살고 있다.
도미니코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그 책은 도미니코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그런 글은 팔리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고, 도미니코는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 대신에 남들이 보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덕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성공을 위해서 스스로를 속이고 삼류 로맨스 소설을 썼다며 비아냥거렸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정말 좋은 작가인지, 이런 인기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늘 고민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캐롤이 나타났다. 빛나는 원을 선물받았던 밤, 캐롤은 투리에게 이건 자신이 이제껏 받아본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투리는 오래전 자신이 처음 발명을 시작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한편 도미니코는 어린 시절 첫사랑인 캐롤 덕분에 소설가라는 꿈이 생겼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캐롤은 그가 쓴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주며 자신이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네가 얼마나 좋은 작가인지 온 힘을 다해 설명했다. 그 모습에 도미니코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그 결과, 도미니코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정말 쓰고 싶었던 두 번째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고, 투리 역시 아주 특별한 발명품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극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투리와 도미니코는 캐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이에 두 사람 역시 캐롤이 그래주었던 것처럼 그녀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캐롤을 도왔다. 그녀 덕분에 다시 꿈꿀 수 있게 된 사람으로서. 나아가 그녀가 작가라는 꿈을 갖게 만든 첫사랑으로서. “도와줘. 이런 말 하기 자존심이 상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사랑 앞에서는 라이벌이었으나 서로의 꿈을 위해 투리와 도미니코는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꿈의 연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영화 <코코>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저승에서의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미구엘은 증조할머니에게 오래전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노래를 들려주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또 울었던 명장면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코코’인지 깨달았다.
사실 코코는 미구엘이 노래를 들려주었던 증조할머니의 이름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서 코코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등장하는 분량으로만 따진다면 엑스트라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제목은 왜 미구엘이 아닌 코코일까. 그건 그녀가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코코의 아버지가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건 가족(코코)을 위해서였다. 비록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 초심만큼은 후손인 미구엘의 손을 빌어 음악의 형태로 딸인 코코에게 다시 전해졌다.
꿈을 꾸는 것만큼이나 그 시작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역시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사느라 처음의 시작을 잊고 지냈던 건 아닐까.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나의 발걸음과 시선은 과거를 향했다. 내 시작은 어떠했는지. 그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꿈도 오래되면 먼지가 쌓일 수 있다. 그 먼지를 털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건 어떨까. 투리와 캐롤, 도미니코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도 처음 자신이 꿈을 꾸었던 순간과 재회하기를 바란다. 뮤지컬 <너를 위한 글자>는 오는 3월 31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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