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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11. 2021

기억속의 할머니

그때 나의 할머니는

문득, 할머니의 세례명이 무엇이었던가 생각했다.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열심히 성당에 다닌 사람이었다. 늘 집에서 손바닥만 한 기도문을 들고 타령조로 읽곤 하셨다. 한글을 잘 모르셨으므로 자주 우리에게 묻고, 자주 엉뚱한 글자로 읽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세례명이 기억나질 않는다니. 

내가 할머니에 대해 잊고 있는 것들은 또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긴, 잊은 것을 다시 떠올리기보다는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것들을 기억하는 편이 빠르겠다. 


생각해보니 내가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할머니는 딸만 둘인 집의 둘째. 옛 시절에 아들이 없었으니 동네에서 양자를 들였다고 했다. 그저 말로만 양자였을 뿐이나, 그분이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묏자리 한편을 내주고 싶어 했다고 한다. 명절이 다가오면 늘 조부모님 벌초를 한다. 그 양자분의 후손조차 벌초를 오지 않지만, 야박하게 그분의 봉분만 남겨둘 수는 없으니 그저 매해 함께 벌초를 한다.  

미루어보건대 할머니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묏자리를 내주던 때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는, "할머니가 하도 원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세상에 없이 착한 분이라고, 생전 시어머니 노릇도, 화내는 법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에 약해서 주변 식구들이 힘든 점도 마찬가지로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좋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나에겐 할머니였고, 할머니가 아니었던 시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도 분명 할머니가 아닌 시절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낯선 동네에 간 적이 있다. 수원의 영동시장 뒷길이었는데 양팔을 벌리면 골목이 손에 닿을듯한 좁고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집이었다. 할머니가 어렸던 아빠를 키우며 살던 집도 그 부근이라고 했다. 

 할머니 친구분은 반색을 하며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손주까지 데리고 왔다고, 오골계를 잡아 끓여주셨는데 나는, '닭이.... 까맣다니...' 하며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애들한테는 이게 약이야." 할머니 친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검은 살을 발라 주었다. 오골계를 먹고 있는 동안 할머니는 친구와 이야기했다.  

그날 할머니가 많이 웃었다. 집에 놀러 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곤 하던 엄마 친구들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에게도 젊은 시절을 함께 이웃으로 지내온 친구가 있었던 거였다. 그이에게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라 친구였겠지. 늘 어른으로, 할머니로만 살다가 그날 하루는 잠시 할머니가 아니었던 시절로 돌아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할머니 얼굴이 밝았던 걸까.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나서 산소에 할머니와 갔었다. 시외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비포장 도로였던 길을 가느라 나는 멀미를 심하게 했다. 산소에 들렀다가 건너편 마을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수원으로 이사를 나오기 이전에 살던 마을이라시니, 아마도 할머니의 젊디 젊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마을의 할머니 친구분 댁에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들은, 항상 그렇듯 이것저것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놓아 주셨다. 할머니 친구는 계속 밥 위에 반찬을 얹어주시며, 도시 아이가 먹을 것이 없겠다는 걱정을 하셨다. 

그날의 분위기는 어쩐지 무거웠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는 그날 어쩐지 슬퍼 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된 때였을까. 아니면 할머니에겐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던 걸까.  

지금도 벌초를 하러 갈 때면 건너편 마을을 본다. 이제 예전 모습은 없어지고 공장 건물들이 들어섰으므로 옛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같은 그림이다. 할머니처럼 푸근한 얼굴을 한 또 다른 할머니가 계속 밥 위에 반찬을 얹어주신다. 우리 할머니는 우울해 보였다. 마당의 소가 가끔 울었다. 

그날 우리 할머니도... 울었을까.


사람들은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엄마인 것이고, 아빠는 아빠인 것이다. 어른들에게도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나는 엄마이지만, 내 딸에게 엄마일 뿐 나는 아주 많은 내가 된다. 아주 많은 내가 되고 싶기도 하다. 

인생의 호칭으로 본다면, 할머니는 제일 나중에 얻는 호칭이다. 누군가의 할머니가 된다. 아마도 언젠가는 손주가 생겨 "할머니!"라고 부를 날이 올수도 있겠다. 집 밖에 나서면 낯선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할머니!"라고. 

언젠가 나 역시 그렇게 "할머니!"로 불릴 날을 상상해본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날이 되면, 나의 할머니가 지금보다 더 많이 그리워질 거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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