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Aug 19. 2021

내고향 수원

그 시절우리의 집들

   나는 수원 토박이다. 토박이들에겐,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된 지금의 수원과는 또 다른 수원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평행이론처럼 말이다. 수원은 아빠의 고향이었고, 고향에 남고 싶어 하는 아빠의 소망이 얹어져서, 남들이 모두 서울로 갈 때에도 우리 가족은 수원에 남아 대를 이어 토박이가 되었다. 타지에서 아빠가 근무하시던 몇 년 사이 태어난 나는, 출생지만 부산일 뿐 기억의 대부분은 수원에서 시작하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지금의 세류동 군인관사에서 살았다. 나는 그 관사를 퍽 좋아했었다. 정문 보초를 서는 헌병 아저씨들과 노는 것도 좋았고, 한여름이면 관사 내 아스팔트가 뽀글뽀글 녹아 올라오는 기포를 밟고 다녀서 엄마에게 혼났지만 그 놀이도 재밌었다. 비어있는 초소 2층은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는 아지트였다. 

   아빠의 근무지가 바뀌면서 우리는 근처의 주택으로 이사 나왔다. 부모님이 처음 지은 주택이었다. 넓지 않았지만 잔디가 조금 깔린 마당도 있었고, 할머니가 심심풀이로 키우시던 닭과 토끼가 있었다. 대문이 완성되기 전이어서 매달려 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대문에 매달려 놀았다. 결국 대문이 주저앉았고, 언니는 다리가 부러지고 나는 손가락을 다쳐 손톱이 빠졌다. 한번 빠진 손톱은 이쁘게 나지 않았다.

"이 손톱은 왜 이렇게 생겼어? " 친구들이 물었을 때 나는, 대단한 모험의 상흔이기나 한 듯 약간 으스대며 말하곤 했다. "으응, 이거. 대문 타고 놀다가 대문 기둥이 부서져서 다친 거야."


   시간이 지나 우리 가족은 매교동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시절 아파트엔 베란다 새시가 없었다. 동생이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아침마다 우렁차게 울었다. 꼬끼오! 꼬끼오! 툭하면 4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는데, 늘 멀쩡하게 살아서 도로 붙잡혀왔다. 

   아래층에는 관사에서 함께 살았던 가족이 있었다. 비행사고로 아빠가 돌아가신 아이와 그 엄마가 살았는데, 가끔 그 아주머니의 남자 친구가 오면 악을 쓰며 크게 싸웠다. 동생과 나는 방바닥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들었다. "또 싸우는 소리 난다." 하며 둘이 웃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들켜 혼이 난 이후 그 장난을 더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아랫집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 예전엔 저런 사람 아니었는데..."


   우리 삼 형제는 자기 방을 갖고 싶었다. 다시 이사하며 그 소원이 이루어진 집은 방이 네 개여서 신났다. 난데없이 정자동이었지만, 내게는 다니던 중고등학교가 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밤 열 시까지 야간 자습하는 고등학생은 막상 그 방에선 자고 일어나 나오기 바빴다.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일곱 시까지 등교하는데 늦지 않으려고 전날 밤 씻고 나선 양말을 미리 신고 잔 적도 있다. 

   걸어가도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아빠는 출근하는 길에 늘 태워다 주셨다. 처음엔 교문까지 긴 진입로에서 아는 친구들을 만날까 봐 근처에서 내리곤 했다. 하지만 점점 차 안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졸기 시작하며 나중에는 교문 앞에 와서 아빠가 깨워야 일어났다. 내릴 때 아빠는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쥐어주셨다. 잠이 덜 깬 얼굴로 "고맙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내리는 일상이었다. 

   그 시절 독서실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했다. 시험이라며 친구들과 독서실에 갔지만, 잠만 잘 자고 나온 이른 아침에 아빠가 독서실로 데리러 오셨다. 친구도 함께 아빠와 앉아 이른 아침의 해장국을 먹었다. 친구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야기했다. "너희 아빠가 새벽에 오셔서 우리 함께 해장국을 먹었지."라고 말이다.


   수원의 모든 새로운 것은 대부분 동수원 쪽에 생겨나던 시기였다. 아파트가, 건물이 자꾸만 들어섰다. 우리 가족 역시  우만동으로 이사했다. 그 아파트에선 여태껏 살았던 그 어떤 동네보다 이웃을 많이 알았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했던 친구들도 만났으며, 심지어 짝꿍도 윗집에 살았다. 어느 날은 은사님을 뵌 적도 있다. 인사를 했더니 내 이름까지 기억하셔서 놀라웠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아이였는데 어떻게 기억하실까 싶었다. 나는 오래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지금도 길에서 만나면 얼굴과 이름이 각기 따로 노는데 말이다.

   언덕 위의 그 아파트를 몇 해 전 언니와 가본 적이 있다. 우리는 흥분했다. "그대로야! 예전과 똑같다! " 함께 갔던 딸아이는 멀뚱멀뚱했다.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풍경이 있는 법이다.


   그 예전 세류동에서 처음 집 장만을 하며 집을 지으신 이후, 두 번째로 부모님은 집을 지어 이사했다. 매탄동 택지지구의 끝자락이었다. 곧 연달아 택지로 개발될 거라는 논이 집 앞에 맞닿아 있었는데 여름이면 백로가 날아왔다. 엄마는 그 논이 택지개발이 되어 집값이 오르길 기대했지만, 나는 창문 넘어 보이는 푸른 논과 흰 백로가 날아오는 그 풍경이 좋기만 했다.

   나는 그 집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긴 했으나 매일 드나들었고, 식당에서 테이크 아웃해가듯 늘 저녁 반찬을 가져가곤 했다. 곧 개발될 거라는 논은 십 년도 훨씬 더 넘어서야 택지로 지정되었고, 논이 흙으로 메꿔졌으며, 집들이 들어섰다. 나는 부모님 댁 바로 옆에 내 집을 지었다. 내 인생 첫 집은 아니었으나, 처음 지은 집이었다. 


   엄마의 기대만큼 엄청 집값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부모님은  바로 이웃한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새로 지은 아파트, 두 분은 편하고 세상 좋다고 하셨다. 그 집은... 부모님의 이 세상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 역시도 아파트로 이사해서 부모님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건너다 보이는 집에 지금껏 살고있다. 부모님이 아프실 때엔 아침에 일어나 매일 등교하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건너편 아파트의 부모님 댁에 갔다. 이제 그 집에는 갈 일이 없다. 부모님은 그 집에 두 분 다 계시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살고있는 이 동네에서 부모님 가까이 삼십 년을 살았다. 부모님이며, 이웃이기도 한 세월이었다. 그러니 동네 어디서든 부모님이 보인다. 함께 갔던 곳이 아직 그대로 있어서 예전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문을 닫고 없어져버린 곳은 어쩐지 쥐고 있던 것을 놓쳐버린 듯 아쉽기 그지없다. 동네를 걷다가 잠시 그늘에 앉아본다. 여기 어디쯤이었지, 하며 예전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수원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그랬듯, 나 역시도 기억의 시작이었던 이곳에서 기억의 마무리를 하게 될 확률이 크다. 내 기억 속 수원을 부모님과 공유하듯이, 아마 내 딸아이도 언젠가는 나처럼 수원의 기억을 우리와 함께 공유해주겠지. 딸아이 역시 수원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벗어나 보지 않은 '수원의 아가씨'이니 말이다. 이렇게 기억이 남아, 추억으로 이어지며 우리는 토박이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속의 할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