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요즘 뒤늦게 착실한 수험생모드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러다가 수석 합격하는 것 아니야? 쉬엄쉬엄해.” 하며 격려하다가, 또 어느 날은 “ 이렇게 하고도 떨어지면 무슨 개망신이래? “하며 은근히 놀리기도 한다. 이처럼 은퇴한 남편의 지난 한 달은 굉장히 규칙적이었으며,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는’ 사이좋은 친구로 잘 지내는 중이다.
남편이 은퇴하고 난 후의 장단점은 여러 가지인데,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은 장점의 범주에 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집안일의 분담이다. 은퇴한 남편에게 “이제 ‘집’이라는 새로운 직장의 인턴이 된 거야.” 라고 말했던 대로, 우리 집 인턴인 남편에게 은근슬쩍 집안일을 넘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많이 넘겼다.
“왜 나눠 맡은 내 일이 더 많은 것 같지?”라는 남편의 불만은 “어헛!” 한마디로 제압했다. 모름지기 ‘인턴’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집안일도 나눠 맡아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 인턴에게도 가끔 땡땡이는 필요하다. 게다가 우리 집 인턴은 아이쇼핑을 사랑한다. 마침 근처의 쇼핑몰이 새 단장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인턴 복지 차원에서 가줘야 한다.
대대적인 새 단장을 한곳답게 쇼핑몰엔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느긋하게 돌아다니다가 여행용 가방 판매대 앞에서 한참 멈추어 서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자주 다니는 편인 우리는 늘 짐이 적다. 비행기를 탈 때도 둘이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가지고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액체류를 사는 일도 거의 없으니 수하물로 짐을 부치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캐리어는 핸들이 가끔 말썽을 부린다. 혹시라도 수화물로 부쳐야 하는 경우를 맞닥뜨린다면 곤란할 것이 분명하다. 새로 바꿔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잘 구르는 우리의 캐리어를 생각하며 망설이곤 했다.
우리는 진열대에 놓인 크기와 색상이 다양한 많은 캐리어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캐리어를 하나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지퍼를 모두 열어봤다가, 다시 닫아보기도 하면서 한동안 그 캐리어를 가지고 놀았다.
은퇴하며 우리가 세운 계획은 매달 한 번씩 여행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국내든 해외든, 이틀을 자고 오든 이십일을 자고 오든 우리가 세운 계획은 매달 한 번의 여행이다. 이번 달은 경주와 안동을 돌아오는 4박5일의 여행이, 그리고 다음 달엔 차를 배에 싣고 제주도로 떠나는 5박 6일의 여행이 이미 예약되어 있다. 그 이후에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여행지는 요즘 뜨고 있다는 중국의 샤먼과 ‘경기도 다낭시’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익숙한 베트남의 다낭이다.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늘 여행을 생각하고 계획한다. 물론 계획하는 모든 여행을 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며, 또 살다 보면 사방에서 태클이 들어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열 가지 계획 중 서너 가지만 이루어지더라도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꿈꾸는 시간은 퍽 신나고 즐겁다.
여행용 가방 판매대에서 발견한 그 캐리어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20인치의 크기. 캐리어 안쪽의 양면에 모두 덮개가 달려있으며, 확장할 수 있는 지퍼는 그 덮개의 안쪽에 있는 디자인. 그리고 써본 적 없는 색상인 검은색. 게다가 적당한 가격까지.
하지만 끝내 우리는 그 캐리어를 사지는 않았다. 마치 당장 비행기를 타러 갈 사람들처럼 여기에는 무엇을 넣고, 여기에는 또 무엇을…. 하면서 즐겁고 신이 났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쓰고 있는 캐리어가 아직 잘 구르는걸. 핸들은 어쩌다 말썽을 피울 뿐이야. 좀 더 쓸 수 있어.”
이런 말들을 남기고 우리는 그 캐리어를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
어쩌면 여행의 준비라는 건 캐리어를 사는 일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찾던 조건 모두를 갖춘, 딱 맘에 드는 캐리어를 발견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사지는 않는다. 새것을 사고 나서도 쓰던 것을 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창고에 짐하나만 더 추가하는 꼴이니 절로 신중해진다. 캐리어야말로 부피를 제법 차지하는 물건일 뿐만 아니라 여행이 아니라면 결코 꺼낼 일이 없는 물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행을 꿈꾸고 계획한다고 해서 매번 떠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간다는 것, 그렇게 낯선 어딘가에 도착하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기 시작한다.
캐리어는 곧 여행이다. 우리가 캐리어 진열대 앞에서 잠시 행복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