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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Jun 24. 2021

셋이 친한데 둘이 속닥거리면....

몸에 상처 입은 것처럼 통증 매트릭스가 작동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셋이서 잘 어울렸다. S는 동아리 국악반에서 같이 거문고를 했던 친구였다. 같은 동아리에다가 같은 악기를 하는, 같은 반 친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다른 한 명인 Y는 아예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은 친구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모두 대학입시에 몰입했던 분위기에서 Y 같은 친구는 매우 드문 케이스였다. 입시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 아이의 책상 위에는 문제지가 아니라 소설책 등 다양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학교를 1년 늦게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우리는 편하게 어울렸다.  


세명이 단짝 친구가 되면서 나는 묘하게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되었다. 나를 빼고 두 친구가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였다.


'나를 빼고 재네 둘만 웃고 있네.'  


그 감정은 매우 강렬했다. 가끔이지만 그런 감정에 휩싸일 때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겉으로는 표시 내지 않았지만 나는 삐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서 마음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친구들과의 관계로 크게 갈등을 빚어본 적이 없는 나는 마음속에 갈등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갈등이 되었다. 내가 너무 쩨쩨하고 속이 좁은 건지, 정말 친구 둘이서 더 친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세 명이 친구로서 끈끈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게 참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명이 함께 공을 던져서 주고받는 놀이를 하고 있다. 놀이 도중에 어느 순간부터 당신은 놀이에서 배제된다. 다른 두 사람이 당신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는다. 이때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들까?


이 단순한 시나리오를 기초로 삼아 신경과학자 나오미 아이젠버거(Naomi Eisenberger)는 실험을 고안했다. 우리가 집단에서 배제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통찰하게 해준다.

 

피험자들은 간단한 컴퓨터 게임을 한다. 그 게임에서 피험자는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와 공을 주고받았다. 연구진은 다른 플레이어들도 사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 그 플레이어들은 공정하게 놀이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피험자를 배제하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았다. 놀이에서 배제당한 피험자는 상처를 입었다. 기분이 상한 수준이 아니라 몸이 상한 것과 같다.


그의 뇌는 상처를 입은 것처럼 통증 메트릭스가 작동된다. 피험자는 뇌스캐너 속에 누워서 이 게임을 하고 있다. 놀이에서 배제당하자, 뇌의 통증 매트릭스에 속한 구역들이 활성화되었다. 공을 못 받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집단이 크든 작든 사회적 배제는 뇌가 통증을 느낄 만큼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2009년 7월 31일 평화 활동가 새라 슈드(Sarah Shourd)와 동료 남성 두 명은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를 걸어서 여행했다. 당시 그곳은 평화로운 지역이었고, 현지인의 추천으로 아메드 아와 폭포를 보러 갔다. 그곳은 이라크와 이란 국경에 있었다. 그들은 이란 국경 경비대에 의해 미국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두 남성은 한 감방에 갇혔고, 새라는 그들과 떨어져 독방에 감금되었다. 무려 410일 동안 하루 두 차례 30분씩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홀로 격리되어 보냈다.


"독방에 갇히고 몇 주, 몇 달이 흐르면 동물과 비슷한 상태로 전락한다. 정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성거리면서 보낸다. 동물과 비슷한 상태는 이윽고 식물과 비슷한 상태로 바뀐다. 정신이 느려지기 시작하고 생각은 반복된다. 뇌는 맴돌면서 극심한 고통의 원천이 되고 최악의 고문이 된다."


새라의 진술처럼, 사회적 결핍은 심한 심리적 고통을 야기했다. 상호작용이 없으면 뇌는 고통을 겪는다. 새라는 금세 환각 상태에 진입했다. 감금된 지 1년이 넘은 2010년 9월 석방되었지만, 그 사건의 트라우마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새라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쉽게 공황상태에 빠졌다.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만은 <더 브레인>에서 독방에 갇힌 사람들의 심리를 '세 명의 공놀이 실험'을 통해 통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집단에서 배제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약간 견딜만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사회적 배제는 통증을 유발하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고문과 같은 수준의 통증으로 발전한다.


데이비드 이글만의 말처럼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은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왜 배제당하면 아플까? 추측하건대 이것은 사회적 연대가 진화의 관점에서 중요함을 시사하는 단서 중 하나다. 바꿔 말해 배제의 아픔은 우리를 타인들과의 상호작용 및 연대로 이끄는 메커니즘이다. 그 아픔은 우리에게 집단을 구성하라고 촉구한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단을 이룬다. 우리는 가족, 우정, 노동, 유행, 스포츠팀, 종교, 문화, 피부색, 언어, 취미, 정치적 연대를 통해 서로 결합한다. 집단에 소속되면 우리는 편안해진다. 이 사실은 인류의 역사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 하나를 제공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er)는 개인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내 주위의 세계가 나의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와 정체성도 결국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머니 체조교실'에 다니신다. 코로나 때문에 실내 수업이었던 것이 요즘에는 야외에서 진행된다. 야외 공연장처럼 생긴 장소에 가려면 20분 넘게 걸어가야 한다. 운동삼아 '동네 어머니들'과 함께 걸어가신다. 함께 걸어갈 동네 어머니들, 끝나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지역의 어머니들, 가끔씩 점심을 같이 먹고 어울릴 수 있는 친구 같은 어머니들은 '어머니 체조교실'을 둘러싼 관계로 엄마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같았다. 오래 살던 동네가 아닌 곳으로 이사를 하셨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을 통한 친구 만들기는 엄마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엄마를 서운하게 하는(정확히는 통증 매트릭스를 건드리는) 사례는 다음과 같았다.

- 같이 출발한 할머니가 돌아올 때 다른 무리들과 어울려 다른 길로 샜다.

- 뭐가 뭔지 잘 모르는 할머니를 위해 시간을 내서 길을 안내하고 친절을 베풀었는데 본체만체한다.

- 마음 맞는 할머니를 겨우 찾았는데, 늙어서도 점심 한 끼 밖에서 못 먹고 남편 밥 차려주느라 부리나케 집으로 달아난다.


그런 일로 전화를 하셔서 "내가 인복이 없어서......"거나 "재수가 없어서...." 류의 푸념을 하셨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딸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하거나  "별스런 사람이 없으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시라"류의 뻔한 말로 대응을 했다. 더 나아가 70대 후반이 되어도 여전히 관계에 집착하는 엄마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뇌 주인 되기 탐구를 위해 뇌의 작용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나이가 어리든 늙든 또래집단과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고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어린 아이나 노인이나 모두 인간이고, 관계와 집단은 생존과 연결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연결 욕구를 가지고 있고,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연결은 면역체계 향상, 수명 연장과 직결되고 삶의 만족도를 높여준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회적 소속감은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었다. 사방이 뚫린 광활한 초원에서 부족과 함께 호랑이의 출현을 감시할 눈을 대동하고 걸을 때와 혼자서 걸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 작은 집단이든 큰 집단이든 무리에 소속되는 것은 본능적인 생존의 욕구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누구와든 상호작용이 필요한 사회적 인간이다. 친구를 사귀며 기쁘고 설레고 서운하고 상처 받는 것은 어린 아이나 노인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관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존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깊은 수준에서 사회적 동물이다.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은퇴 후에도 사회생활은 계속되어야 하고, 죽을 때까지 친구가 필요하다. 친구가 되는 기준을 허물고 마음을 열어 관계를 넓히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 대문사진 : Pixabayfancycrave1님 이미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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