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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May 14. 2021

멍계의 지존, 숲 멍

걷기 멍도 만만치 않다

어제는 2만보를 걸었다. 정확히 20,130걸음

아침 6시30분부터 70분가량 숲을 걸으면 대략 8천보 정도된다. 아침마다 걷다 보니, 이제 습관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습관이다. 남편이 일찍 퇴근하여 같이 오후 6시경 다시 숲으로 갔다. 90분가량 걸으니 1만보 정도 되었다.


밤에 딸아이와 페이스톡을 하며 하루 동안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일본 대학에서 건강검진을 했단다. 체중, 키, 혈액검사 등등 아주 기초적인 검사인데, 4학년인데도 또 했다고 한다. 일본은 뭐든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꾸준히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 꾸준히 하다 보니 잘하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갔던 일본의 노벨상 수상실적 30명(일본 출신 외국 국적자 포함)은 이런 뭐든 꾸준히 하는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까.


하여튼 딸은 건강검진을 하며 정말 오랜만에 몸무게가 40kg대로 진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49.2kg이란다.(이거, 일급비밀인데 구독자님에게만 공개하는 거다. ㅋ) 중학교 이후에 50 미만은 처음이라고 한다. 일부러 다이어트 같은 걸 하지 않는 아이가 왜 몸무게가 줄은 건지, 너무 못 먹는 건지, 너무 운동을 많이 하는 건지 등등 진단에 들어간다.

"그냥 집에서 너무 잘 먹다가 여기서는 그만큼 못 먹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취업 준비한다고 몸무게 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거 같다. 마음이 짠 하다. 그래도 페이스톡 하며 보는 딸이 자꾸 이뻐지고 있는 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살이 빠지니까 카메라 잘 받아서 그렇게 보인 거였다.


나는 딸에게 특별히 보고할 게 없다. "오늘은 숲에 두 번 갔어" 정도. 말하다 보니, '가만.... 오늘 그럼 몇 걸음이지?' 하고 생각하며 삼성헬스 앱을 켜보았다. 2만보에서 몇십 걸음 부족했다.

"와! 2만보 가까이 됐다. 이제 몇 걸음만 걸으면 되겠어."

통화를 하며 집안 여기저기를 걸었다. 그래서 채운 2만보.



2만보는 하루를 내가 '걷는 인간'으로 잘 살았다는 표시이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세 시간은 걸어야 나오는 숫자이다. 작정하고 최소 두 시간 이상은 걷기에 시간을 할애해야 가능하다. 일하며, 또는 쇼핑하며 여기저기 다녀봐도 1만보를 넘기는 건 쉽지 않다. 내 생활패턴으로 보면 생활 속 걷기는 많아봐야 7천~8천보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다양한 시도를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즐기지만 몸을 꾸준히 움직이는 것을, 정확히 말하면 반복적인 운동을 하는 걸 싫어했다. 테니스, 스쿼시, 에어로빅, 태극권을 잠깐 했고, 1년 정도 마라톤 동호회 활동도 했었다. 하지만 정말 꾸준히 해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냥 시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내가 '걷는 인간'으로 진화한 데는 남편의 집요한 잔소리가 있었다.




걷기는 사람, 공간과의 새로운 조우


10여 년 전 집 주위 강변 산책로를 따라 남편과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정말 흥미 없는 일이었다. "강변에 나가자"하고 남편이 말하면 걷는 게 좋은 일이긴 하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기는 싫어서 늑장을 부리고 있으면 남편의 미간이 구겨지고 현관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게 보기 싫어 서두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아주 짧은 거리를 목표로 다녀왔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왕복 30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그것만 해도 기특한 수준이었다. 걷기는 걸었으니까. 그러던 게 아주 조금씩 거리와 시간을 늘려갔다. 단순히 걷는 것이라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시간을 내고 집을 나서는 일이 어려울 뿐이었다.


당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나와 남편이 따로 시간을 내서 대화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이었다. 둘이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온전히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만들어졌다. 시시콜콜 아이들 학교 얘기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아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걸 남편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걷기 이력이 점점 쌓이면서 한번 걸으면 90분 정도는 너끈히 걸어내는 인간으로 성장해 나갔다. 내 발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내가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것과 같은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그냥 산에 올라갔을 뿐인데 산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걸었을 뿐인데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남이 운전해주는 차로 어느 곳을 가보는 것과 내가 직접 운전해서 그곳에 가는 것이 또 다른 느낌인 걸 알 수 있다. 운전과는 또 차원이 다른 게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걸어서 가는 것은 뛰어서 가는 것과 또 달랐다. 온전히 공간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딛어 나가는 것이었다.  


항상 우리가 걷는 시간은 밤이었다. 저녁 먹고 걸으면 어둠이 벌써 내려와 있었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걸으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우리는 퇴근하고 나서 저녁 먹고 난 뒤, 어둠 속에서 걸었다. 도시의 산책로라 적당히 밝긴 했지만, 밤의 걷기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만물이 차분하다. 소란스럽지 않다. 이미 어둠으로 채색을 해놓아서 모든 게 정갈해 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렇게 걷으면서 우리는 많은 걸 이겨냈다.


직업인으로 살면서 부닥치는 매우 큰 고비들이 있다. 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들이다. 남편도, 나도 그런 일들을 지나쳐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말을 우리는 그냥 들어주었다. 대꾸는 필요 없었다.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가끔 "더 생각해봐"라거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힘들겠다" 수준의 표현에 머물렀다. 걸으면서 얘기하고, 들었다. 조용히 걷고 침묵을 지키기에는 어둠 속이 좋았다. 많은 시간과 많은 고비들을 걸으면서 지나왔다. 걸으니까 지나올 수 있었다.    




숲을 걷는 집중의 시간


숲을 걷는 것은 또 다른 묘미를 준다. 도시 산책로와는 다른 차원이다.


나란히 걸으며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길은 가끔 만날 수 있다. 산책로는 발 밑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만 신경 쓰면 어디든 발을 내딛는데 조심성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을 그대로 담은 숲은 그렇지 않다. 길에는 나무뿌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돌멩이는 부지기수이다. 조심성 없이 아무렇게나 걸으면 발목을 삐끗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길을 살피고 걷는데 집중해야 한다. 같이 걸어도 혼자 걷는 것과 같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걷는 게 오히려 더 좋다. 가까이 붙어서 걸으면 다른 풍경이 안 보이고 앞사람의 발끝만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5미터 정도 떨어져서 걷는다. 무슨 말인가가 하고 싶어 지면 거리를 좁힌다.


숲에서는 밤에 걸을 수가 없다. 빛이 있을 때만 걸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숲이 가장 좋다. 햇살은 부드럽고 새들은 노래하느라 바쁘다. 저녁시간에는 해 넘어가는 시간을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 숲에서 시간을 길게 보내다가 어두워지면 "하이, 빅스비!"를 외친다. "손전등 켜줘" 하고 불 밝히며 돌아오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발 밑에 있는 돌 모양을 어둠 속에서 구별하며 걷는 게 이만저만 어렵지 않다. 자주 하고 싶지는 않다.


숲길을 걸으며 대화를 많이 하지 않으니 이 생각 저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념무상이 어디 그리 쉽던가.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고, 번잡스러운 마음들이 오가지만 그 생각을 떨치는 것이 숲을 걸을 때 가장 쉽다. 볼 게 많아서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어떤 꽃이 새로 피었는지, 저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 벌레들이 왜 나를 계속 따라오는지 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이 많다.


아침에는 남편 출근시간 신경 쓰느라, 저녁에는 해지는 거 신경 쓰느라 숲 속에서 바삐 걷는다. 어느 구간은 아예 뛴다. 주말 이외에는 어슬렁거리며 걷지 못한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딱 멈추고 머무르는 공간을 만들었다. 만들었다기보다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정했다고 하는 게 맞다. 판판한 돌을 의자처럼 나란히 괴어 놓은 멋진 공간에서 쉬었다가는 것이다.

     


       



멍 때리기 최고의 장소, 숲


숲 산책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숲 멍 시간.

숲 멍 바위에 도착하면 출발한 지 약 35분 정도 된다. 반 정도 흐른 것이다. 돌덩이는 네 개다. 그중에서 그 날 제일 깨끗해 보이는 돌을 찾아서 앉는다.


앉아서 가만히 숲을 바라본다. 눈이 편안하다. 숨을 더 천천히 쉬며 심호흡을 한다. 가슴이 편안하다. 눈을 한번 감아본다. 새소리가 들린다. 귀가 편안한다. 바람 부는 날은 바람소리를, 비 온 다음 날은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좋지 않은 건 없다.


눈을 뜨고 멍하니 바라보면 숲이, 나무들이 항상 같은 곳에 있지만 매일 다르게 느껴진다.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때죽나무와 사방오리나무가 양쪽에 있고, 멀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곳곳에 보인다. 하늘도 그대로 거기 있다. 멀리 높은 곳을 봐도 좋고, 가까이 초록빛 나무들만 봐도 좋다.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날도 있다.




멍 때리며 얻을 수 있는 것들


시인 라이너 마이너 릴케의 이야기가 있다. 1912년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 두이노 성에 체류하고 있던 릴케는 절벽 근처를 몇 시간씩 산책했다. 당시 몇 년째 의미 있는 시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절벽 끝 바람소리를 들으며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 첫 구절을 써낸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바람소리 사이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게 전기 작가 도널드 프레이터의 말이다. 뇌과학자 앤드류 스마트는 이것을 '노이즈와 확률공명'으로 설명한다. 내면이 보낸 약한 신호를 바람이라는 노이즈가 증폭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한가하게 지낼 때 오리혀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 릴케는 들고 다니던 작은 공책에 이 구절을 적었고, 방에 돌아와 그날 저녁 <루이노의 비가> 제1비가를 완성했다. 머릿속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단어들을 포착하려고 미친 듯이 시를 써내려 갔다.


릴케는 멍 때리기를 '한가한 시간 동안 내면에서 일어난 방대한 움직임의 마지막 잔향'이라고 표현했다. 이걸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휴지상태 네트워크(Resting-State Network),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르는데, 두뇌가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것을 말한다.


딴생각을 하거나 몽상에 잠겼을 때, 오후에 눈을 감고 잔디밭에 누워 있을 때나 근무 중 창밖을 바라볼 때 활성화된다. 흥미롭게도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아하 모멘트'는 본인 두뇌의 휴지 상태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경험하게 된다.


<뇌의 배신> 저자 앤드류 스마트가 표현할 것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빈둥거릴 때, 두뇌에 널리 퍼진 광범위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모드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걱정을 내려놓고 평온하게 지낼 때에만 이러한 활동들이 나비들이 날아오듯 두뇌에서 벌어진다. 그러다가 휴식을 중단하고 일하면, 나비들이 흩어지듯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불이 꺼진다.


이런 과학적 사실을 알게 되면 동기부여 전문가들이 내놓는 철저한 시간관리의 기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것이든 성과물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시간관리를 통한 자기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들, 보다 창의적인 것들, 장기적인 계획이나 결정적인 성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생활의 빈틈, 어슬렁거림, 멍 때리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번, 앤드류 스마트의 말을 곱씹어 보자.


한가롭게 쉬는 것을 죄악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게으르게 살 권리를 이해하고 옹호하며 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좋은 삶(Good Life)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활동이 왕성할 때 두뇌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통찰이 일부 사람에게서만 이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놀라운 통찰을 하기 위해서, 독창적인 발상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가롭게 빈둥거리거나,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냥 창밖을 내다봐도 좋다.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방법도 시도해볼 만하다. 촛불을 켜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누워있는 것, 등을 똑바로 펴고 앉아서 명상하는 것, 꽃향기를 맡는 것, 나무를 안거나 만지는 것, 그냥 있던 자리에서 눈을 감아보는 것..... 수도 없이 많다.


잠시라도 핸드폰은 보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거나 자주 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보다 몸에 좋고 뇌에도 좋은 방법은 걸으면서 멍 때리는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은 숲을 찾아서 나무들 속에서,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노이즈(약한 신호를 창의적인 발상으로 만드는 확률공명의 노이즈 말이다) 삼아 멍 때리는 것이다.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된다.

단 5분, 10분이라도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허락해보자.

자신에게 멍 때리기를 허락하는 사람들은 "아하!!!" 하는 순간(모멘트)을 경험할 수 있다.


  

새로운 숲 멍 장소가 생겼다. 죽은 나무들을 깎아서 보기 좋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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