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있고, 그냥 그렇게 해야 할 여건이 생겨서 하기도 하고, 의미 있는 일을 찾다가 하기도 하지만 그게 뿌듯한 일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복기가 불가능한 여러 상황들이 만들어지면서 저절로 경험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계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일 중 하나가 애들 데리고 간 '1주일 미국 동부 자동차 여행'이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3인의 여행자는 멋도 모르고 씩씩했다. 원래 모르면 용감한 법이다.
뭘 봤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대부분 어렴풋하다.
그저 '고생 끝에 추억 온다'는 사실만 되새길 수 있었다.
엄마의 영어 恨을 풀어줄 수 있겠니
나는 9세와 6세, 만으로는 8세와 5세인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 동생네로 향했다. 큰애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애는 유치원생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영어공부 좀 시켜보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언어는 어릴 때 이미 큰 그림이 다 그려지기 때문에 모국어 같이 편하게 외국어를 공부시키려면 어릴 때를 공략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여러 차례 접한 후였다. 어떻게든 이 엄마가 너희에게 영어 공부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주마, 그래서 이 엄마같이 되지 않도록 지도 편달하겠다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었다.
나한테 영어는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영어만 리스닝하게 되면 머리 내부가 마비되는 듯 멍해졌다. '수ㅏ알라수ㅏ알라' 뭐라고 하는데 정말 일부만 들렸다. 영어 성적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정도였지만 리스닝은 정말 안됐다. 언어가 다 깨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부분적으로 단어만 들렸다. 직장 생활하며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해 다니기도 하고, 사내에서 외국인 강사 모시고 진행하는 영어회화반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미국 체류 일정은 두 달이었다. 한 달 정도는 각종 서머캠프에 보내 영어환경에 익숙해지도록 신경 썼다. 작은 아이는 어려서 주로 놀이 프로그램에 참여시켰고, 큰 아이는 미국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에 다녔다. 아들은 매일매일 캠프에 갔다 오고 난 뒤 오늘은 몇 퍼센트가 들렸는지 수치로 알려주었다. 뭐든지 수치화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 성향이 엄마를 크게 만족시켰다. 아주 똑 떨어지게, 20%에서 점점 수치가 상승해 90% 넘게 들린다고 했다.
"그래, 비행기표 끊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영어공부를 학교에서 10년 하고 직장 다니면서까지 해도 50%도 안 들리는 엄마와 비교하니, 너무 만족스러웠다.
영어가 90% 듣는 아들이 가이드로
서머캠프가 끝나고, 나는 영어가 90%까지 들리는 아들을 데리고 미국 여행에 나섰다. 이 정도면 통역도 하겠다 싶고, 지도 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운전할 도로를 가이드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주 든든했다.
그때를 한참 지나 '아홉 살짜리 애기들'을 보니 너무 어려서, 그때의 아홉 살 아들에게 품었던 믿음과 괴리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키 작은 아들은 나에게는 큰 애, 맏이였고 동생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선임이었다. 이 정도 키웠으면 많이 키운 '큰 애'였기 때문에 여행 가이드 정도는 하고도 남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렇게 믿으니 아들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우리 언니는 일곱 살 때부터 막냇동생을 업어서 키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집안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자란 언니가 실제로 얼마나 막내를 업었는지 잘 모르지만, 맏이는 항상 동생을 돌봐야 하고 집에 일이 생기면 자식 중 책임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맏이는 그 집 환경에 따라 뭐든지 가능하다.
많은 부모는 제일 큰 놈에게 동생을 지키라 하고, 나 같은 엄마는 미국에서 가이드까지 하라고 요구한다.
우리의 여행 경로는 미국 디트로이트 인근에서 시작해 워싱턴 D.C., 뉴욕을 찍고 올 참이었다.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 D.C. 와 세계 제1도시인 뉴욕을 둘러봐야 미국에 와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복 수천 킬로에 달하는 길이었다. 그때 내비게이션은 없었다. 모든 걸 종이지도에 의존해야 했다. 운전은 내가 하고, 뒷자리에 아이 둘이 탔다.
나는 영어 듣기 능력뿐 아니라 공간감각이 매우 무능력한 수준인 길치인데도 겁이란 게 없었다. 그냥 생각나고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실천능력만 작동했다. 호텔은 프라이스라인을 통해 동생이 예약해주었다. 여행 계획은 나의 평소 성향대로 치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대충 편하게 한 바퀴 돌 예정이었다. 먹을 거 싸들고 떠나는 피크닉을 좀 길게 다녀오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가이드로 임명된 아들은 유전자 품질개선 작업이 이뤄진 듯 안 알려줘도 알아서 알아내는 걸 잘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도 남북방향은 홀수, 동서방향은 짝수로 매겨져 있고 메인 도로와 연계도로가 숫자로 연결되어 있는 것 등등을 지도를 보고 혼자서 알아냈다. 그것을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가본 고속도로'라는 제목으로 방학과제로 제출했다. 부모와 여행하며 가 본 고속도로와 연계해 우리나라 고속도로 번호체계를 탐구한 과제는 내가 보기엔 놀라웠는데, 어떤 상도 받지 못했다. 아마 선생님은 어른이 해준 과제로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이런 '도로 전문가'를 모시고 떠나니 길치였지만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이 느낌은 남편하고 떠난 도로 여행마다 전투를 치렀던 경험과는 사뭇 대비되었다.
쌍으로 길치인 우리 부부는 지리산을 가다가, 영주를 가다가 이쪽으로 가야 되는지 저쪽으로 가야 되는지 몰라 허둥댔다. 운전하고 있던 남편은 무능해 보였으며, 길을 묻기 싫어하는 게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까칠해지다가 결국엔 회복 불가의 전투 상태가 되었다. 지도를 봐도 길을 찾기가 어렵고, 길을 잘 잃었고, 잘 싸웠다. 이런 부부에게서 나온 아들이 지도 보기를 좋아하고, 길을 잘 찾아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니 인생이 흥미진진하다.
믿고 맡기면 뭐든 가능한 놀라운 일들
차는 올케 차를 빌렸다. 지도를 보고 미국 도로를 운전하는 일은 쉽지 만은 않았다. 미국에서 한 달여간 동생네 차를 운전해봤지만 집 근처를 맴도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초행길이고 미국 고속도로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통행료가 없는 고속도로가 많아서 좋았지만 그 대신 도로 관리는 그에 맞게 완벽하지 않았다. 파여있는 길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출구(OUT)가 1차선으로 된 곳도 있었다. 우측통행 도로는 출구는 당연히 오른쪽인 걸로 생각했는데 고속도로 가다가 맨 왼쪽 차선, 그러니까 1차선에서 나가야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 교차로나 출구 등에서 길을 엉뚱한 곳으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역시 남편 하고는 급이 다른 아들은 대처도 다른 그레이드로 했다. 하나도 당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엄마를 흡족게 만들었던 '인생 한 마디'를 던진다.
"괜찮아요. 돌아가면 돼요."
조금만 가면 돌아가는 길이 있고, 그래서 약간만 돌면 된다는 거였다. 돌아가도 아무 문제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돌아가면 어떠리. 쫌만 돌면 된다. 문제 자체가 안되는 거였다.
아이가 하는 말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고민한 흔적이 없는 정말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진리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진리는 이렇게 낮은 곳에 있고 어린아이 말에 있다. 복잡하게 따져서 만들어내는 말은 대부분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보이지만 뼈 대리는 명쾌함이 부족하다.
길 한번 잘못 갔다고 능력 운운하고, 책임 운운하던 나와 남편의 길 찾기와는 차원이 달랐다.그냥 우리는 잘 가도록 해보고, 잘못되면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도 아무 문제없다.몇 초 몇 분 만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길 찾기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과정에 불과하다. 몇 분, 몇십 분, 아니 몇 시간 좀 늦어도 괜찮다. 돌아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도 만나게 된다.
그 뒤로 혼자서 풀로 운전하는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이 없다. 어떤 날은 혼자서 10시간 넘게 운전하는 일도 있었다. 작은 아이가 어려서 화장실에 자주 들러야 돼서, 급하면 아무 데든 일단 출구로 나가서 볼일 보고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잘못 나간 덕분에 볼티모어란 도시를 살짝 엿보기도 했다. 저녁 즈음에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풍성한 분위기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풍경 덕분에 아무 정보도 없던 볼티모어는 풍요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1주일의 짧은 기간이었다. 아이는 여행의 리더였다. 아이가 말하는 대로 나는 운전을 했고, 도시 안을 여행하며 걷거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도 아이가 길을 알아서 찾아냈다. 책임이 온전히 주어질 때 아이는 나이 같은 건 상관없이 그냥 그 역할을 잘 해낸다. 어리바리한 엄마를 안심시키는 정신적 리더 역할까지 훌륭했다. 나는 정말 가이드로서의 아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냈다.
2003년 8월 미국 북동부 8개 주와 캐나다 일부 지역이 블랙아웃되는 대정전이 있었다. 우리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막 나올 때 블랙아웃을 맞았다. 대중교통은 마비됐고 도시는 대혼란 상황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거리에 한가득이었다. 위로든 아래로든 일렬로 죽~ 걸어가는 사람이 즐비했다. 너도나도 구분 없이 한없이 걸었다. 그냥 거리에서 잘 거라는 얘기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뉴욕시내로 들어올 때 버스를 타고 왔는데 호텔로 갈 어떤 대중교통도 이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무더운 한여름에 하염없이 호텔이 있는 라과디아 공항 방면으로 걸었다. 맨해튼부터 일단 한인타운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거기 가면 뭐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먼 거리를 걸으면서도 아이들은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누울 자리 봐가며 다리를 뻗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한인타운에 도착해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여기저기 물으니 일시적으로 자가용으로 영업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있는 차가 있길래 무작정 노크하고 물었다.
"차를 호텔까지 태워줄 수 있을까요?"
운전자는 영업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면서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린애 둘을 데리고 지치고 당황스런기색으로 서 있는 애엄마가 딱해 보였던가보다. 피곤했던 그도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가 타라고 했다. 호텔까지 태워주겠단다.
'야호~~~~!!!!'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의 천사님은 코트라 직원이었다. 뉴욕에 근무 중이고 그때 막 숙소로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우리가 노크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환난의 와중에 천사를 만날 수 있다. 평상시에 천사 찾기는 쉽지 않다.(성씨가 이씨셨다. 명함을 받아두었는데 분실해서 고마움을 전할 수가 없다. 2003년 8월 14일 밤에 뉴욕 한인타운에서 라콰디아 공항 근처 호텔까지 피곤을 제쳐두고 손수 태워주셨다. 아이 둘과 엄마에게 내려오신 '우리의 천사님'을 정말 찾고 싶다.)
돌아가도 '정말' 괜찮은 거잖아?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도 괜찮다. 아무 문제없다.
다시 한번 아이의 말을 곰곰이 새기는 날들이 몇 달째 흘러가고 있다.
미국 여행에서 정신적 가이드까지 제대로 해냈던 그 아들이 취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돈을 벌어야 되겠어요." 그렇게 말했다. 청천벽력 같았다.
아들이 회사원이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타고나기를 뭘 탐구하는 걸 좋아해서 학자의 길을 밟아나가는 게 제갈길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충격을 알아챈 듯 아들은 돌아서 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현장 경력 쌓아서 공부를 계속할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전화로만 몇 마디 오가는 긴 시간이 지나간 뒤에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이 연구분야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취직을 해보겠다고 한다. 그냥 무작정 여행을 해보거나 그냥 쉬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얘기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단다.
긴 고민의 시간 끝에 우리 부부는 무엇이든 아이가 행복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을 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가 30년 넘게 걸어본 길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얘기가 많다. 똑같이 월급을 받아도 일을 하면서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자기가 한 일을 자기 이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길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서두르지 말자고.
어떤 길이든 돌아서 제 갈길 찾아가면 된다. 돌아가도 된다. 괜찮다. 정말 아무 문제없다. 나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