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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May 31. 2021

"늙었다고 하는 건 외모 평가예요, 엄마"

늙은 딸이 싫은 건 늙은 건가,외모 평가인가?

딸의 말이 엄마에게 유전된다


"며칠 전에 보니까, 니가 니 언니보다 더 늙었어."


엄마는 내 얼굴을 늘 살핀다. 얼굴 컨디션에 따라 건강상태가 어떤지, 불편한 일이 없는지 등을 가늠하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으니 말이다. 피부는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 영혼과 정신이 어떤지 보여준다. 거기다 제일 중요한 표정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할리우드 배우 뺨 맞고 갈 정도로 연기력이 있다 해도 엄마 앞에서 표정은 한없이 솔직할 수밖에 없다.


나도 어느 틈엔가 딸 얼굴이 부었는지, 뭐가 났는지, 눈은 생글생글 한지, 입꼬리가 처지지 않았는지를 살피고 있는 걸 알고 있다. 나도 그러면서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나한테 그러시는 게 그렇게 듣기가 싫다.


드디어 엄마는 안 하면 더 좋을 말까지 하고 계셨다. 두 살 위 언니보다 내가 늙었다는데, 이건 치명적 외모 평가 아닌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엄마, 이제 외모 평가 좀 하지 마세요. 얼굴 가지고 사사건건 말씀하시는 건 안 좋아요!"


어머나, 나는 딸의 말을 그대로 하고 말았다. 딸의 말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고 있다. 딸이 엄마한테, 그 엄마가 다시 엄마에게로 반대로 말이 유전되고 있다.


뼛속 깊이 무의식으로 부모의 영향을 안고 산다는 걸 나이가 들어가며 더 실감하게 된다. 몸속에 새겨진 유전자뿐 아니라 말과 행동 모두 말이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한테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도 느끼게 된다. 아이가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나도 그 세계에 빠지게 된다.


아이는 아기 때부터 말투에서부터 어휘, 표정이나 제스처까지 부모를 그대로 모방하며 배우며 성장한다. 아이 탓할 게 아무것도 없는 게 부모가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식이 부모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까이 있는 서로를 자신도 모르게 모방하고 있다는데 친밀함이 깊을수록, 가족일수록 따라 하기의 정도와 깊이는 한이 없다. 특히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 하는 행동과 말, 선호하는 것들은 나도 모르게 각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좋아하는 백예린 음악을 함께 듣기 시작했다. 파일로 음악을 고르고 구매해서 듣는 게 아직 편하지 않은 나는 딸에게 "네가 듣는 음악 좀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딸은 엄마의 취향을 생각해보고 괜찮을 것 같은 음악을 골라 전송해준다. 이 중에서 어떤 게 좋은지 알려달라고 하고, 다음번에는 그 기준을 고려해 다시 음악을 고른다. 엄마와 딸이 서로의 거울이 된다.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아빠, 그건 외모 평가예요!"


남편은 딸의 송곳 같은 지적질을 자주 당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를 넘어 착하게 생겼다, 못되게 생겼다까지 생긴 것에 대해 많은 잣대를 들이미는 아빠에게 딸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세상 모든 인간 중 가장 너그러워지는 존재를 딸로 여길 수밖에 없는 보통의 아빠인 남편은 딸의 지적질에는 뒤로 물러선다.


"아, 그런 거야?"  

    

그렇게 아빠는 새로운 젠더 교육과 관점 바꾸기 교육을 딸로부터 받는다. 고집 센 중년의 남자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은 딸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좋은 의도로 말한 것조차도 외모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받고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칭찬한다고, 안부를 묻는 차원의 외모 평가를 얼마나 자주 하고 있는가. 나는.


페미니즘께나 한다고 생각했던 엄마였지만 우리에게 여성주의란 약자의, 피해자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허물어뜨려야 하는 차별의 벽에 갇혀있었던 게 사실이다. 온당치 못한 차별이 너무 만연해서, 너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이런 섬세한 시각까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외모 평가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문제는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많이 하다 보면 그게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평가를 받는 대상에게 상처를 주기 십상이다. 학교 다닐 때 성적에서부터 인성평가, 직무평가를 거쳐 업무능력 평가까지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평가의 늪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중 마음에 상처를 내는 평가의 으뜸은 외모 평가이다. 다른 평가는 나이가 들면서 없어지거나 바뀌는데 외모 평가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늙으면 얼마나 늙었는지 평가받는다.  




나이를 묻지 마세요


얼마 전부터 새로 시작한 취미생활이 있다. 글씨를 나무에 새기는 서각이다.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를 고수 선배께서 두 차례 지켜보신 뒤 한마디 건넸다.


"올해 몇 살이에요?"


나는 "아직 젊어요"하고 얼버무린다.


"50은 넘었죠?"


이렇게 물으시니 "네, 그렇죠"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 있던 서각 선생님이 한마디 거든다.


"그럼, 당연히 그렇겠지."


헐... 고수 선배는 선생님에게 손사래를 치며 왜 이러냐고 눈치를 준다.


선생님 표정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나타난다. 나는  "생각하시는 것보다 10년을 적게 말씀하시면 아무 탈이 안 날 걸요"하고  웃어넘겼다. 웃지만 웃고 있는게 아니다. 으흠, 스스로 동안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으로 변해가고 있다.


젊다고 하는데 싫다는 사람이 없고, 자기 나이로 평가받거나 더 많은 나이로 평가받으면 싫은 내색이 역력하다. 명퇴한 옛 직장동료는 80대 어머니가 누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언잖아하시며 대답을 안한다고 말했다.


외모 평가만큼이나 자주 나이라는 잣대로 서열을 정한다. 동갑이면 더 반갑다고 하고 동생이니, 형님이니 하는 말로 친근감을 과시한다. 나이 상관없이 그냥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고 싶은 나는 참 불편하다.


TV에서는 오늘도 동안이다, 예쁘다. 잘생겼다. 몸매가 좋다, 식스팩, 얼굴천재 같은 말이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서로 형님이나 동생으로 부른다. 아는 형님이 또는 아는 동생이 하며, 나이 서열을 분명히 한다. 남자 친구가, 남편이 모두 오빠가 되어버린 이 시대, 외모지상주의와 가족호칭 지상주의에 물들어 있다. 좋은 의도로, 친근함의 표현으로 시작했던 한마디가 나비효과로 외모든 나이든 그걸로 순번을 매기는 서열주의 문화를 더욱 짙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튼 늙었다는 말을 들은 늙은 딸은 기분이 안 좋다. 훨씬 더 늙으신 엄마가 애정을 듬뿍 담아 걱정스럽게 한 말씀에도 화들짝 반응한다. 언니보다 더 늙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외모 평가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감정 반응은 한 가지 이유로만 나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지가 좀 오래되었다. 화장대 거울 앞 조명은 어두침침하고 손거울 같은 거 본지는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효도하기 위해서라도 책상 옆에 거울을 하나 들여야겠다. 정신의 검열에만 몰두하던 터라 얼굴을 검열한 지가 까마득하다. 지금 먹고 있는 콜라겐이 효과가 없나 보다. 비타민제처럼 마트에서 콜라겐 하나 사 먹으며 나름 노화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분자 몇 짜리를 먹어야 흡수가 잘되는 거지? 에고, 엄마한테 잘보이는 건 너무 어렵다.


  

# 윗 이미지 :  Pixabay의  M. Maggs님 이미지  



대구여성가족재단 블로그-조화로운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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