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요. 지난밤에 꾼 꿈 때문이에요. 사촌동생만 예쁜 옷을 갖고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기만 하는 꿈이었어요.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옷장 문부터 열어보았어요. 옷장 안에는 작년에 샀던 꽃잎 모양 분홍 드레스와 유치원 핼러윈 데이에 엄마가 사준 신데렐라의 파란 드레스가 걸려 있었어요. 다른 날 같았으면 분홍 드레스를 보며 1학년 학예회 때 노래하던 내 모습이 생각났을 텐데 오늘은 아니에요. 오늘은 꿈속에서 보았던 사촌동생의 모습만 생각나지 뭐예요. 나는 심통이 났어요. 그래서 냅다 거실 밖으로 뛰어나가 엄마를 불렀답니다. 부엌 싱크대 앞에서 등을 보이며 아침을 짓고 있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리셨어요.
“정 다홍!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엄마, 나 새 드레스 사줘!”
“뭐라고? 얘가 아침부터 왜 이런데?”
“나 새 드레스 사줘. 새 드레스 사달란 말이야!”
나는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떼를 쓰기 시작했어요. 엄마 표정이 새 드레스를 사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안달이 났지요. 엄마는 기가 차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쳐다보았어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까지 버둥거리며 더 큰 소리로 떼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엄마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어요.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 넘치고 있었죠.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도로교통 상황을 중계하는 리포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한동안 입을 꼭 다문 채 나를 쳐다보기만 하던 엄마가 손에 든 국자를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어요. 그러고는 찌개 불을 끄고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 전원까지 껐죠. 엄마가 끌어 넘치는 찌개 불을 끄지 않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 나는 이제 죽었어요.
“정 다홍, 너 당장 안방으로 들어와!”
엄마는 애써 화를 누르며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어요. 손에 나무주걱을 든 채 말이에요. 일곱 살 때는 나무젓가락, 8살 때는 사은품으로 받은 10센티미터 나무 자더니 9살이 되자 나무주걱이에요. 오늘은 일요일이라 아빠도 집에 계시지 않는데……. 아빠는 월요일만, 그것도 둘째 넷째 주 월요일에만 쉬는 어린이 도서관 사서랍니다. 말이 사서지 사실은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전부 도맡아서 하고 있어요.
나는 울상이 된 채 안방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정말이지 나는 새 드레스가 갖고 싶으니까요.
“정 다홍! 아침부터 너 그게 무슨 버릇이야?”
엄마는 나를 앞에 세우고 다짜고짜 야단을 치기 시작했어요.
“너,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는 했어?”
나는 주눅이 든 채로 고개를 흔들었어요.
“그럼, 네 방 정리는 끝냈니?”
이번에도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지요. 엄마는 정말 치사해요. 정작 야단치려는 일은 끄집어내지 않고 꼭 나한테 약점이 되는 일부터 문제 삼으니까요.
“그래 놓고서, 뭐? 드레스를 사달라고?”
엄마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어요. 표정에는 이미 내가 엄마에게 승복하고 말 거라는 확신이 서려있었고요. 나는 엄마 얼굴을 한번 흘끗 보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아니요, 이번에는 절대로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아침에 세수도, 방 정리도 하지 않고, 얼마 전에 엄마에게 떼쓰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해 놓고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떼를 쓰기는 했지만요. 이번에는 정말 새 드레스를 가져야 해요. 그래야 며칠 뒤에 자신 있는 모습으로 사촌동생이 출전하는 피아노 콩쿠르에 참석할 수 있으니까요. 옷장 안에 있는 드레스는 예쁘기는 하지만 이미 유행이 지나가버린 것이잖아요?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학예회를 하거나 큰 행사가 있지 않으면 새 드레스를 사주는 법이 없어요.
엄마는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끝까지 고집을 피우자 결국 매를 들고 말았어요.
“정 다홍! 입은 다물고 있어도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지? 얼른 손바닥 내밀어!”
엄마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안방을 나갔어요. 손바닥이 얼얼하고 아팠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이었어요. 매를 맞아서가 아니라, 엄마가 한마디도 내게 새 드레스를 갖고 싶은 이유를 묻지 않아서예요. 그리고 정말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땐 눈물이 핑 돌았지요. 하지만 나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꼭 참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어요. 아, 정말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에요.
점심시간이 되도록 방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요. 엄마도 밥 먹으러 나오라고 부르지 않았지요. 슬슬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방문을 빼꼼 열고 거실 밖을 내다보았어요.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조용했어요. 부엌으로 살금살금 나가보니 식탁 위에 신문지로 덮어놓은 점심상이 차려져 있고, 그 옆에 조그만 메모가 놓여 있었어요.
‘아빠가 서류 두고 온 것이 있대서 엄마가 전해주고 올게. 일어나거든 점심 먹고 클라리넷 교습 다녀와.’
치, 주걱으로 세 대나 때려놓고서 겨우 클라리넷 학원을 다녀오라니, 우리 엄마는 정말 너무해요. 나를 위해서 매를 든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단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러는 것 같거든요. 정말로 나를 위하는 거라면 몇 번이라도 말로 타일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는 새 드레스도 사주고요.
나는 식탁에 차려진 오므라이스와 된장국을 서둘러 먹고는 클라리넷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어요. 아침의 좋지 않은 기분을 씻어낼 겸, 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치마를 꺼내 입고 타이즈와 가을에 새로 산 구두를 신었지요. 눈이 내려서 춥기는 하지만 이렇게 입고 나가지 않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거든요. 그 위에 작년에 이모가 사준 하얗고 보드라운 털이 수북한 긴 외투를 입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현관문 앞에 걸어둔 전신 거울에 슬쩍 비춘 모습은 완벽했어요. 긴 생머리에 조금 가무잡잡하지만 갸름한 얼굴, 오뚝한 코, 벨리댄스로 다진 몸매까지 나무랄 데 없었지요. 그에 비하면 나보다 한 살 어린 사촌동생은 키가 작고 얼굴은 귀신처럼 하얀 데다 머리는 남자아이처럼 짧고 비쩍 말랐어요. 그런 동생이 며칠 있으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간다며 전화를 했지 뭐예요. 사촌동생과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가깝게 지냈는데 엄마는 삼촌네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사촌동생이 귀여워 죽겠다면서 안아주고 얼러주고 장난도 아니었어요. 또 사촌동생이 별것도 아닌 일을 할 때마다 예쁘다며 칭찬해 주었지요. 나는 그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어요.
한 번은 숙모가 사촌동생이 만든 미술작품을 현관문 옆에 걸어두었는데 엄마가 그걸 보더니 신통하다며 얘는 미술을 시켜야겠다고 칭찬을 하지 뭐예요. 나도 사촌동생처럼 비싼 미술학원에 다닌다면 그런 작품쯤은 식은 죽 먹기로 만들었을 거예요. 오히려 학원을 다니지 않는데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는 내가 더 신통하지 않나요? 사촌동생이 만든 컵케이크를 먹을 때도 엄마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사촌동생의 유치원 영어 발표회 때도 엄마는 나를 데리고 참석해 꽃다발을 주었지요. 내 유치원 학예회 때는 삼촌네가 한 번도 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또다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애써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구두까지 신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요. 나는 결국 문어 입이 된 채 문화센터에 도착했어요.
강의실에는 벌써 클라리넷 교습을 함께 받는 같은 반 친구 한송이와 두 학년 위인 주혜 언니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빈 오빠가 와 있었어요. 빈이 오빠는 내가 1학년 때부터 너무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는 오빠예요. 친구들은 내가 중학생이 된 빈이 오빠를 따라서 클라리넷을 배운다며 놀려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나도 빈이 오빠가 클라리넷을 분다는 사실을 이곳 문화센터에 와서야 알게 된 걸요. 오빠가 클라리넷 부는 모습을 보고 더 좋아하게 된 건 사실이지만요. 송이는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친해진 친구예요. 하지만 학교에 가면 송이보다는 짝꿍으로 지내는 민정이와 더 잘 다녀요. 송이는 민정이와 어쩐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나 뭐라나. 나는 모두 함께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두 살 많은 주혜 언니는 우리 넷 중에서 클라리넷을 제일 잘 불어요. 선생님도 주혜 언니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는 미국에 있는 무슨 예술학원에 유학을 갈 생각이라고 해요.
“어머, 이게 누구야? 다홍이 아니야? 선생님은 무슨 눈의 여왕이 들어오는 줄 알았네.”
교실 안에 들어서자 클라리넷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어요. 나는 조금 멋쩍은 웃음을 띠고는 자리로 가서 서둘러 클라리넷과 악보를 가방에서 꺼내 들었어요.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지요. 송이와 주혜 언니도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주었어요. 내가 자리를 잡고 서자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지휘봉으로 악보대를 가볍게 두 번 탁탁 치셨어요. 우리는 모두 클라리넷을 입에 대고 악보에 나온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뒤에 서 있는 빈이 오빠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더 열심히 클라리넷을 불었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어요. 어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제일 자신 없는 부분에서 소리가 새고 만 거예요. 마우스피스에는 침이 흥건했어요. 클라리넷을 배운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곡은 연주하기가 제일 힘든 곡이에요. 꼭 마지막 절정 부분에서 이렇게 소리가 새고 만다니까요. 선생님이 내 앞으로 오셨어요.
“어? 다홍이 오늘 예쁘게 입고 오느라 연습을 소홀히 한 모양이네. 다른 때보다 소리도 더 엇나가는 걸?”
선생님은 클라리넷을 넘겨받으시더니 마우스피스를 수건으로 닦아주셨어요.
“봐, 마우스피스에 침이 또 흥건하게 젖어 있잖아. 선생님이 말했었지? 연주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숨을 쉬어주어야 한다고. 얘들아, 너희들도 잘 들어. 특히 높은음 자리로 음정이 올라갈 때는 숨 쉴 틈이 없기 때문에 그전에 숨을 충분히 들이마셔야 해. 그래야 음정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길게 끌고 나갈 수 있는 거야.”
“네.”
선생님의 말에 모두 클라리넷에서 입을 떼고 엄숙하게 대답했어요.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빈이 오빠 앞에서 이렇게 망신을 당하다니요. 그리고 나 때문에 송이와 주혜 언니, 빈이 오빠까지 듣지 않아도 될 주의를 듣고 말이에요. 더욱 기분이 나빴던 것은 선생님이 내가 치장하느라 연습을 소홀히 했다고 말한 거예요. 어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녁 먹기 전까지 연습했는데도 말이에요. 선생님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곡은 나한텐 정말 어렵단 말이에요. 아, 방금 전까지 조금씩 나아지던 기분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어요. 그 뒤로는 클라리넷 교습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 버렸어요. 머릿속에 온통 사촌동생 생각뿐이었지요. 강남의 유명 피아노 학원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교습을 받는 사촌동생이 나는 어쩐지 너무나도 미웠어요. 일주일에 다섯 번이라면 나라도 콩쿠르에 나갔을 거라고요! 게다가 선생님과 일대일 교습까지 하고 말이에요. 나는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문화센터에서 교습을 받는데 말이에요. 왠지 모든 게 불공평한 것 같았어요. 기분이 한없이 지하세계로 꺼지는 것 같았지요. 어둡고 축축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칙칙한 지하세계로 말이에요.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홍아, 우리 다홍이 가 오늘 기분이 왜 안 좋지?”
아빠가 내 방문을 살짝 여시 더니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어요. 집에 돌아온 나는 내내 방에 틀어박힌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엄마는 오전의 일로 내가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줄 아는지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빠의 귀에 뭔가 쏙닥쏙닥 귓속말을 했어요. 방에 있으면 두 분이 쏙닥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줄 아나 봐요. 분명히 오전에 내가 야단맞은 일을 일러바쳤을 게 뻔해요. 아빠가 방으로 들어오자 나는 이불을 더 꽁꽁 뒤집어쓴 채 모른 척을 했어요. 아빠가 내 침대 맡에 앉았어요.
“다홍아, 아빠가 지난번 네가 읽고 싶다는 책 가져왔어. 어서 일어나서 봐봐.”
나는 아빠가 책을 가져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불을 홱 거뒀어요. 역시 아빠가 최고예요! 얼마 전 아빠에게 어른들이 읽는 잡지를 잔뜩 빌려다 달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 어른들이 읽는 잡지에는 온갖 패션 정보가 가득 들어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도 엄마가 나는 아직 어른들이 읽는 잡지를 읽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셨어요. 종종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내용이 있다나 뭐라나.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내용이라니, 엄마 따라 미용실에 가서 본 잡지에는 온통 패션에 헤어, 메이크업뿐이던 걸요?
“야호! 아빠 고마워!”
나는 아빠를 두 팔로 꼭 껴안으며 외쳤어요. 아빠가 활짝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 주셨지요.
“그렇게 좋아? 아빠가 진작 빌려올 걸 그랬구나. 엄마가 저녁식사 차리고 계시니까 저녁 먹기 전까지 봐. 알았지?”
“네!”
나는 힘차게 외치고는 거실로 뛰어나갔어요. 거실에는 엄마가 두꺼운 잡지를 한 권 들고 서 있었어요.
“정 다홍!”
엄마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어요. 칫!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나를 야단치려는 거지?
“자, 여기 네가 읽고 싶다는 잡지. 그런데 이 책을 보기 전에 꼭 알아둘 게 있어.”
나는 눈을 새침하게 뜨고는 엄마를 쳐다보았어요.
“아빠가 이 책을 빌리려고 얼마나 애를 썼다고. 지난번에 엄마가 잡지는 안 된다고 반대했었잖아, 그랬더니 아빠가 몇 날 며칠이고 고민한 것이 온통 일본어로 된 패션 전문 잡지를 빌려오면 되지 않겠냐는 거였어. 그렇지만 아빠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이런 책들이 없잖니? 이 책을 빌리려고 중앙도서관까지 다녀오셨단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가 더 고마워졌어요. 그리고 일본어로 된 잡지라도 내가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돌려준 엄마도 고마웠지요.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엄마를 껴안았어요. 엄마도 나를 꼭 껴안아주었고요. 하루 동안의 나빴던 일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잡지를 건네받은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어요. 잡지 겉표지에는 잡지 이름인 듯, 일본어가 크게 세 글자 쓰여 있고 숫자 12가 아랫부분에 작게 나와 있었어요. 아름다운 갈색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델이 올 겨울 시즌 유행을 목표로 하고 있는 파란 가방을 내민 채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요. 나는 잡지를 정신없이 넘겨보며 예쁜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은 예쁜 모델들을 유심히 살펴봤어요. 어떤 페이지에는 액세서리만 잔뜩 실려 있었어요. 모두 값나가고 고급스러워 보였지요.
일본어로 된 잡지를 보는 사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어요. 엄마는 저녁상 앞에서 내가 방에 틀어박혀 깜박 잠이 든 사이, 빈이 오빠와 송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말했어요.
“클라리넷 교습 시간에 있었던 일 들었단다. 빈이가 많이 걱정하던걸. 네가 축 늘어진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이야. 집에 잘 들어갔는지 걱정이 돼서 전화했나 봐.”
“빈이 오빠가? 정말? 아이 좋아라.”
나는 입안에 스파게티를 잔뜩 문 채 말했어요.
“송이도 그래서 전화한 거야?”
“송이는 뭐 물어볼 게 있다던데? 뭐냐고 물었지만 말을 안더라. 네가 내일 학교에 가서 물어봐.”
“응, 알았어.”
나는 송이가 뭘 물어보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분명 오늘 입고 간 하얀 털 코트를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보려던 걸 거예요. 송이는 종종 내가 입은 옷이 예쁘다며 어디에서 샀는지 묻곤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다 대답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타깝게도 예쁜 옷들은 죄다 선물을 받거나 이모가 사준 것들뿐인 걸요? 그래서 송이가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자랑하듯 엄마가 또는 이모가 뭐 백화점에서 사 왔다고 둘러댔어요.
“다홍아.”
아빠가 접시 옆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나를 불렀어요.
“다홍이는 요새 패션에 관심이 많은가 보구나? 패션 잡지를 다 보려고 하고. 아침에는 엄마에게 새 드레스를 사달라고 졸랐다는 얘기도 들었다.”
거 봐요. 엄마가 아빠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한 게 맞죠? 엄마 아빠가 그럴 때마다 나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 들고는 해요. 가끔은 엄마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아빠가 몰랐으면 할 때도 있거든요. 나는 스파게티가 반쯤 남은 접시를 내려다본 채 고개를 끄덕였어요.
“새 드레스는 왜 가지고 싶은 거니?”
아빠가 물었어요. 나는 어쩐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촌동생보다 더 예뻐 보이고 싶다는 말을 차마 내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아요? 클라리넷을 배운 지 1년이 넘도록 콩쿠르는 꿈도 못 꾸는 나에 비해 동생은 배운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지역 콩쿠르에 나가니 말이에요. 패션 잡지를 운운했던 것도 동생의 콩쿠르 소식을 듣고 나서였어요. 잡지를 보면서 내가 입고 싶은 드레스를 고르고 싶었거든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는 숙녀가 다 되었다는 얘기가 듣고 싶었어요. 콩쿠르에서 내가 사촌동생보다 돋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하지만 나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어요.
“말하고 싶지 않구나? 알았다.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두렴. 아빠는 다홍이가 클라리넷 교습 시간에 선생님에게 지적을 당했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아. 그건 다홍이가 스스로 클라리넷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우는 거고 또 그만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야. 선생님도 우리 다홍이 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힘내, 아자!”
아빠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기합을 넣어 준 덕분에 나는 웃음이 났어요. 저녁식사 시간은 화기애애하게 지나갔어요. 나는 저녁을 먹은 뒤에 계속해서 패션 잡지를 보았고, 엄마가 사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디자인 몇 가지를 골라냈지요. 어린이가 입는 드레스에도 그런 디자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엄마가 사준다면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고를 작정이에요. 나는 아침과는 다르게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잡지를 덮고 양치를 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어요. 오늘은 불을 켠 채 잠이 들 거예요. 불이 밝게 켜진 천장을 보며 콩쿠르에 나간 내 모습을 상상할 거예요.
그날 밤, 나는 정말로 콩쿠르에 나간 꿈을 꾸었어요. 잡지에서 고른 드레스를 입고 예쁜 구두를 신고, 반짝반짝 빛나는 클라리넷을 들고 조명이 환하게 켜진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완벽하게 연주했지요. 꿈속에서는 사촌동생이 청중으로 등장했어요. 동생은 내가 무대에 나오자 힘껏 박수를 쳐주었어요. 안타깝게 콩쿠르에서 1등을 하지는 못했어요. 1등은 주혜 언니가 한 거 있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아주 어려운 곡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으니까요. 1등을 못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끝까지 연주한걸요? 아빠 말대로 분명히 아주 많이 연습하고 노력한 게 틀림없어요. 나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객석에 앉아있는 사촌동생에게 꽃다발을 받았어요. 그때까지도 조명은 나만 비추고 있었답니다. 기분, 정말 최고였어요!
-Ⓒ 2021년 아프리카와 고양이 글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