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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서 일기(孤讀書 日記)

-고독한 마음으로 그댈 읽고 애달픈 마음으로 연애편지를 씁니다.


 두개골 안에 현무암같이 거칠고 모난 큰 돌덩이가 꽉 끼인 것처럼 생각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머리로는 마음으로는 뜨거운 말들이 흘러나오고 싶어 안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는데 막상 그 마음들 바깥으로 내놓으려 자판을 두드리면 말들은 갑판 위에 널브러진 멸치 떼 마냥 맹렬하게 파닥거리다가 차갑게 식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떤 마음들을 내보이며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 그네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읽어본다. 어떤 이는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이의 뼈아픈 성장을 애틋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부모의 삶을 되돌아보며 뜨거운 회한을 토해낸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어떤 남편의 글은, 그는 대체 누구일까, 어떤 이일까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해진다. 바보,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남편인데, 어쩌자고, 피식 웃으며 결혼과 동시에 나에게 살림이라는 루틴을 안겨준 남편을 슬쩍 쳐다본다. 나의 남편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데 글쓴이의 츤데레 같은 달달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 대해 남편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겠지.


 살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강요당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 역할은 나에게로 돌아왔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 루틴이 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물론 살림을 잘하는 축에 끼는 아줌마들에 비해 속도가 많이 느린 편이긴 하지만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 신혼 초에 좌충우돌했던 것과는 분명 차이가 날 정도인데, 그땐 짐이 아니었고 지금은 나를 옥죄는 족쇄같이 느껴진다. 아이러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려던 게 아닌데 살림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몸이 그 루틴에 익숙해져 버리고 나면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들도 기계적인 움직임 마냥 무미건조해져 버린다. 살림을 하다 보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과 바깥으로 나온 말들 사이에 확연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인지 나와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인지....


 이른 퇴사와 워라밸을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의 글은 공감대가 잘 생기지 않는다. 내가 살아왔던 청년 시절과는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르다. 차갑고 너무 공정하다. 어려움이라 할 만큼, 억울하다 할 만큼 큰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나의 것은 어느 것 하나 손해보고 싶지 않다. 반면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단락 한 단락이 고비고 삼키기 힘들 만큼 쓰고 아리다.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게 된다.

 한 차례 희로애락의 파도타기를 하다가 다시 나의 글로 돌아와 보지만 커서는 그대로고 머릿속은 액화질소를 들이부은 것처럼 퍼석하게 얼어붙었다. 와사삭 와사삭 부서지며 흩어진다.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만큼은 이렇게가 아니면 도저히 마음속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서기 때문이에요. 이렇게가 아니라면 나의 말들은 내 몸의 움직임처럼 먼지를 털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개며 청소기를 밀고 먼지를 닦습니다. 정해진 움직임 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없는 움직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김샌 한숨이 되어버리지요.   


 신년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당신을 만나러 서점엘 갔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모습은 얼마나 근사했었는지요.... 당신은 짙은 색의 목폴라 니트에 체크무늬 트위드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메를로 퐁티를 이야기하다가 고대의 사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읽어주는 역사가가 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식을 즐기고 요리하는 셰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요리를 맛보고 환희의 한숨을 쉬는 사이 당신은 또 어느새 선이 가는 청년의 모습이 되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신장애인 형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작가가 되었다가 어린 시절 여러 집을 전전긍긍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위탁아동이 되기도 하고 격동의 세월이 만들어낸 역사의 창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그 빨간색 연지를 바른 작은 입술로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저를 믿어주지 않아요.”라고 말했을 때의 그 희열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는지요.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당신의 백치미가 담긴 그 한마디에 나는 그만 당신이 부러워지고 맙니다. 앙상한 손을 모은 채 창백한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던 당신의 모습은 또 어땠는지요. 자기 안에 춤추고 있는 욕망을 여자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아내란 이유로 스스로 억누르고 소거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당신의 삶은 공동이 자리 잡은 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 창백한 얼굴을 애절한 손으로 한번 훑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말이 어떨지 알면서도 지금의 삶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당신처럼 말입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헤어짐의 시간을 외면하고 싶어 돌아선 자리에 당신은 어둠만큼 짙은 남색 망토를 두른 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악성림프종이라는 이름의 죽음을 달고서 말이지요. 나는 당신의 이. 야. 기. 가 궁금해졌습니다. 죽음이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당신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의 이야기가 말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에 대해 말을 아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설명을 할 뿐이었습니다. 당신의 지성을 끌어와 죽음을 이야기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온 힘을 담아 설득했지요. 그 설득의 말이 너무도 지적이고 아름다워 한순간 아아 이렇게 아름다운 농담이라니, 슬퍼졌습니다. 뜬금없이 퍼뜩 말입니다. 당신의 말속에 이유는 있었지만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아, 나는 진정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이 언젠가 악성 뇌암에 걸려 온갖 신경통을 견뎌내야 했던 시크하고 유머러스한 일본 여류작가의 모습으로 분해, ‘의외로 천국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라’ 고 말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당신을 나는 다시 만나고 싶었나 봅니다. 등에 업은 죽음 따위, 매일 먹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듯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 당신을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그런 모습을 이번 이야기에서는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가 봅니다. 그래도, 뭔가 슬프도록 애달파 나는 당신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다시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때는 살아내기 위한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요. 부디 많은 이야기들로 당신이 그 힘든 시간을 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집 한쪽 귀퉁이 벽에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철학자가 되어 역사가가 되어 작가가 되어, 창녀가 되어, 우울한 여인이 되어, 고아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젊은 방송인이 되고 선이 고운 청년이 되어.... 삶의 여행자가 되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 마음이 아파 나는 당신의 계단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을 읽고 당신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때론 얄팍한 지성에 의지해 당신을 해부해 보지만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채워지기보다 공허해집니다. 사랑을 할수록 더 큰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다채로운 색으로 빛을 내고 있는 당신의 계단 위에서 망설이고 좌절하다가 잠깐의 온기에 희열을 느끼며 밤을 지새웁니다.

 그러면 당신은 시크한 독거노인이 되어 이렇게 말하겠지요. 죽음이 아닌 삶을 초월한 듯 함박 웃는 얼굴로.      

왜 이토록 책을 읽는 걸까?
이만큼 책을 읽었으니 나도 유식해야 하는데 아는 게 별로 없다.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철학자라도 되어야 했던 건 아닌지. 나는 철학할 틈도 없이 다음 책을 읽었다. 게다가 그 많은 책을 전부 누워서 읽었다. 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책을 읽을까? 사촌인 다미에 언니는 안락의자에 앉아 읽는다. 독서답다.
요즘은 책을 읽어도 다음 날이면 까맣게 잊는다.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다. 옛날에 읽은 책도 다 잊었다. 멍청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독서는 쓸데없었다. 독서만 좋아했던 내 인생도 헛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내가 그리운지요? 당신이 아무리 모진 말로 나를 조롱해도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앞에 있어도 그리운 당신을 더 애절하게 그리워합니다.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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