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느릿느릿 아줌마와 나무늘보
Sep 15. 2021
"전 아드님이 이해되네요."
"그쪽은 누구 없어요?"
"모를 거예요."
"네?" 내가 되물었다. 놀라고 애절한 한숨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무슨 뜻일까. 아무도 없다는 뜻일까. 너무 많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랑한 남자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이나 수시로 갈아치우며 만나는 남자들에게 분풀이하고 싶은 마음만 남았다는 뜻일까? 안타깝게도 내 아들 역시 분명 그럴 거라 생각되지만, 그녀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사람이 많았을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슬쩍 들어갔다가 흔적도 증표도 남기지 않고 슬쩍 떠나버리는 쪽일까?
-FIND ME, 안드레 애치먼 p.18
놀라고 애절한 한숨처럼 누군가의 삶에 슬쩍 들어갔다가 흔적도 증표도 남기지 않고 슬쩍 떠나버리는 쪽. 지독한 비염약을 먹고 물먹은 솜처럼 지척지척 시간을 넘기고 있는 와중에 엿보게 된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비염약이 일으키는 환각보다 더한 몽상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어느쪽일까요? 라는 질문이 무색하게, 흔적도 증표도 남기지 않고 슬쩍 떠나온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어보다가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쪽으로 도망을 가버립니다. 아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잘했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었을까요? 그는 어쩌면 내가 남긴 흔적을 가끔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며 추억을 그리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계획은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라고 말해야겠군요. 겁쟁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흔적을 남겼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가 만일 나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면,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린 시간 속에서 내가 그런 것처럼 그도 그러고 있다면, 나, 당신이 하얀 대낮에 선사한 그 하얀 몽상에 계속 빠져 있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