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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을 용기

단 하나의 질문에 답이 없다는 완벽한 대답




우치다 타츠루. 


그의 이름이 입에서 익숙하게 발음이 되기까지 한 달이 걸린 것 같다. 내가 즐겨 읽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과 는 달리 확실히 뭔가 수월하게 발음되지 않는 걸림돌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난생처음 책모임에 참석하고 나니 왜 그랬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했던 것만큼 [완벽하지 않을 용기]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걸려 넘어지고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모임 이후 그의 이름이 거짓말처럼 쉽게 발음이 되는 걸 보니, 역시 그런 거였어, 수긍하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주제, 어색한 첫 책모임,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방향성 없이 뒤섞이다가 하나이자 여러 갈래의 결론으로 모아지고 납득이 되고 서로 다독임으로써 얻게 된 기묘한 안도감, 그리고 울렁거림. 내가 제대로 말을 하기나 한 건가 하는. 난생처음 책모임에서 저자 우치다 타츠루가 내게 안겨준 풍경과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총제적 난국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그날의 풍경을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올려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 동천동 마을 책방 <우주소년> 입구  2. 내가 앉은자리에서 입구 쪽 창문 방향 풍경. 동네경제지원 플랫폼 <핑계 부엌>에서 만든 잼과 청류를 넣어 파는 냉장고가 보인다  3. 책모임에 나온 학부모들과 맛있는 다과를 준비해오신 주최 선생님  4. <우주소년> 프런트 데스크와 책모임을 주최해주신 [함께하는 교육연구소] 선생님 두 분   5. <우주소년>의 센터를 차지한 책 진열대


이렇게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나의 첫 책모임 [완벽하지 않을 용기]를 이야기했다. 


[완벽하지 않을 용기]


[완벽하지 않을 용기]는 저자 우치다 타츠루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우리나라 전국 곳곳을 다니며 교육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모아놓은 책이다. '교육'이라는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하다 보니 강연을 듣는 청중 대부분이 교사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강연이 끝난 후 우치다 타츠루와 교사들이 했던 질의응답을 책 중간중간 삽입했다.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이야기로 구분되어 있다.  


2014년 첫 번째 이야기,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2015년 두 번째 이야기, 동아시아기의 평화와 교육/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2016/2017년 세 번째 이야기,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2018년 네 번째 이야기, 미래교육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2019년 다섯 번째 이야기, 어른을 찾습니다


차례에서 보면 알듯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진정한 어른' 개념으로써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던지는 단 하나의 화두는 어른된 입장에서 


아이들의 성숙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 화두에 답을 내리기 전에 우치다 타츠루는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간다. 


어른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우치다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해 가족의 해체와 아버지의 몰락, 경제성장의 결과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한 노동력의 대량화와 능력주의가 빗어낸 사회의 획일화가 어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처음 에필로그에서부터 덜컥하고 걸림돌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우치다 선생님이 말하는 어른의 개념이 남성에게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우치다 선생님은 부권제 사회에서 오리려 아이들이 잘 성장했다고 얘기하면서 아버지의 위상이 몰락하고 남녀노소의 욕망이 균일화 되면서 아이들이 갈등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성숙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권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미성숙하거나 인간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수록 아이가 잘 성장했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죠. 아버지가 미성숙하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아이들은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겁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이들은 망설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 p.29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이들은 갈등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성숙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 다양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육아 전략을 지닌 어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육아,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일은 공동작업이고 단일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p.31


 물론 그 뒤로 우치다 선생님은 부모 외에도 고모, 외삼촌 등 여러 가족의 다양한 의견에 따라 아이가 성숙할 기회를 얻는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부권 사회의 몰락으로 인해 아이들이 성숙할 기회를 잃었다는 의견에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책모임이 끝나서도 여전히 수긍이 되지 않는데, 부권제 사회가 몰락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 외에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 친구 또는 깨어 있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성세대보다 더 크게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어떤가 하면 미성숙한 어른이 권한이 있다는 이유로 아이의 미래를 섣불리 결정하고 선택의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아이들을 폭력적인 갈등 속에 몰아넣고는 망설임 속에서 성숙한다고 얘기하는 쪽보다는 권한은 미약해졌더라도 진정한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의견을 이야기하는 쪽이 아이들의 성숙에 훨씬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쪽이다. 뭐 어쨌든 그렇더라도 이 하나의 걸림돌만으로 우치다 선생님이 [완벽하지 않을 용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논점을 흐리려는 것은 아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말대로 현대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우치다 선생님은 "어른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정답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모두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고 말하며 자아를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에 비유해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근거를 제시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자아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집합주택, 아파트 같은 것입니다. 지저분한 목조건물에 사람들이 있고, 가운데 복도가 있어서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는 거죠. 아주 조용한 사람도 있고, 시끄러운 사람도 있고,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더럽히는 사람도 있고, 더럽히는 사람도 있고, 제멋대로인 사람도 있고, 야비한 사람도 있고, 의외로 품위 있는 사람도 있고, 손이 큰 사람도 있고, 구두쇠도 있을 거고요. 그 많은 사람이 제 안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중재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집주인은 아니고, 그냥 주민 중 한 명이지만 '모처럼 한 곳에 살게 됐으니 사이좋게 지내요'라고 말해주는 거죠. 때때로 깨끗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매번 집을 더럽히는 사람을 내보내야 된다, 쫓아내자고 하면 조정역이 가서 달래는 식으로요. -p.115

아파트는 주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커집니다. 규모도 커지고 생활이 풍부해집니다. 주민들이 점점 다양화되니까요. 이 아파트 전체가 하나로써 기능하니까 뭔가 문제가 생길 때 '이 문제는 302호에 사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한다, 저 사람이 적임자다'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돈을 많이 버는 사람, 토론 잘하는 사람, 남을 잘 속이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의 다양한 특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거죠. 거기서 '나'는 여기 살고 있는 한 명의 주민이 아닌 아파트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p.116

저는 인간이 이렇게 자기 내면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적 요소를 발굴해서 키워냄으로써 다양한 타입의 인격을 갖추어가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성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른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럴 수도 있지'하며 상대방의 말에 이해와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애주의자여서라거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 줄 것이 있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생하는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p.120


우치다 선생님은 이렇게 다양한 면면을 갖고 있는 개인이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에 집중하고 고민하고 선택한 뒤에 성숙하게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갈등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다양한 말을 하고 다양한 요구를 하는 상황에서 말이 다 다르잖아? 하며 갈등해야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르고, 교사의 이야기가 다르고 다른 선생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으면 또다시 다른 이야기가 쓰여 있고.... 자기가 살아가는 길에 유일한 로드맵 같은 건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서로 다른,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메시지를 샤워하듯이 받아내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교육역량이 높은 교사라도 모든 아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주파수가 있으므로 주파수 잘 맞는 아이도 전혀 맞지 않는 아이도 있을 수 있겠죠. 거기에 불만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장이 맞지 않는 아이는 다른 주파수를 가진 선생님들이 보면 됩니다. 여러 선생님이 각자 다른 시선으로 아이의 다양한 면모를 보는 겁니다. 이 선생님이 평가하는 부분과 저 선생님이 평가하는 부분이 다르고, 저 선생님이 비판하는 부분과 이 선생님이 비판하는 부분이 다른 상황. 이게 아이들에게는 숨 쉴 여지를 제공해줍니다. 다양한 가치관에 노출될 수 있는, 하나의 가치관에 집약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안심하고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p.182


그런 의미에서 우치다 선생님은 교사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사 개인의 역량보다는 교사로서 역할한 개개인이 모여 이룬 교사단의 개념을 새롭게 조명한다. 


교사단이란 영어의 'faculty'라는 단어에 대응합니다. 단순한 의미로 보면 지금, 동 시기에 교육에 종사하는 선생님들을 말합니다. 그 멤버들의 방법과 이념이 달라도 교육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조차 달라도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사단의 역할은 결국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란 바로 집단의 차세대를 성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p.181

그러면 교사들은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일까요? 교사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라는 존재는 집단으로밖에 기능하지 않습니다. 복수의 교사가 집단을 형성해야 비로소 기능하는 것입니다. 교사 집단은 수평적인 공동체입니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학교에서 일하며 동료로서 함께 교육활동을 하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수직적인 공동성도 존재합니다. 시대를 넘어 교사들이 서로 역할을 교대하며 하나의 교사단을 이어나갑니다. 30년, 50년을 넘는 수명을 가진 교원 주체가 통일성을 갖고 존재합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긴 생명력을 가진 집단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교육에 관해서 책임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교사들은 타성이 강한, 100년이 지나도 멘탈리티가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100년 전의 교사와 지금의 교사 개인들을 비교하면 전혀 다를 겁니다. 하지만 교사 전체로 본다면, 교사 집단이 가진 기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교육은 긴 시간을 두고 많은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어 하는 일입니다. 동시대 사람들과도 공동 작업을 하고 있지만 죽은 사람과도 공동 작업을 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30년, 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교육활동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p.44

교육에 절망하는 사람은 모든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단연코 오만한 생각입니다. 과거의 교사들과 미래의 교사들, 함께 교육에 힘쓰는 동세대 교사들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런 걸로 절망할 리 없으니까요. 타율 2할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교사로서의 하루하루가 굉장히 유쾌해집니다. 스트레스도 없어집니다. 기분이 좋은 선생님은 점점 창의적인 궁리도 하게 되고 학생도 '오늘 선생님 기분이 좋으시네'하고 관심을 기울이니 타율도 점점 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아마 한국의 교육부도 마찬가지겠지만 문부과학성 등의 기관에서 올바르고 유일한 교육법이 있다고, 교사가 그걸 학습하면 모든 학생이 눈을 떠서 교육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말해 거짓말입니다. 올바른 교육방법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교육방법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렇게 많으면 많을수록 타율이 올라갑니다. 이 타율은 교사 개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교사단 전체의 퍼포먼스 전체의 성과로밖에 측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신 교육할동의 성과는 지금으로부터 30년, 50년 후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성숙해서 어른이 됐을 때 나옵니다. 한국 사회가 건전하게 기능하고, 그들이 건전한 시민이 되어 있다면 그 교육활동이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너무 열내지 마세요. 2할이면 됩니다. -p140~141

"교육은 절대 실패가 용납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사들에게는 무엇보다 동료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완벽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사단에 대한 우치다 선생님이 이런 조언은 대학 진학률을 두고 교사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고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모든 교육 시스템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면서 실패하면 주저 없이 버리는 주식회사 식의 정책을 채택하는 우리 교육 정책을 돌아보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로 교육에 등급을 매기고 우열을 가리기 시작하면 교육은 1등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고 그곳에는 다양성이라는 변수가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 교육 정책대로라면 1등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짐으로 전락해 버려지게 된다는 것인데, 학교가 취급하는 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에서 과연 이런 교육정책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우치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래서 우린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는 '요컨대'라는 말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답이 없는 상태를 견뎌내는 힘이 중요합니다. 해답이 없는 상태를 견뎌내지 않으면 복잡화라는 과정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물음이 나올 때마다 척척 대답하는 사람은 절대로 복잡화된 세계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결론 내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주의에 의해 세계가 위기적 상황을 맞이하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아무도 근본적인 대책을 내지 못하는 오늘날,  '요컨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스스로 복잡화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다음 날, '왜 이렇게 됐냐'는 질문에 '여러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고 대답한 것처럼요. 이런 대답으로는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고, 마음도 정리되지 않겠지만 어찌 보면 그게 가장 올바른 대응인지도 모릅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하나의 요소를 주섬주섬 꼼꼼하게 나열하며 가능한 자세하게 기술하고, 총체적으로 봤을 때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한지 평가하는 것까지가 복잡화의 과정입니다.  -p304~305


그렇다면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혼재하는 환경 안에서 아이는 어떻게 자기 중심을 찾아가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한 선택에 흔들리며 쓰러지는 일이 생겨도 다시 일어서서 타인과 공생할 수 있을까? 우치다 선생님은 신체적 감수성을 키우고 지성으로써 자연을 민감하게 느끼라고 말한다. 


신체에 내포된 가능성을 발굴하는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떤 걸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나빠지는지 아는 것이죠. 예를 들어 뜨거운 프라이팬에 손이 닿아 '앗, 뜨거!'하고 손을 떼는 상황에서 팔꿈치 아래쪽만 움직이는 사람은 없겠죠? 무의식적으로 전신을 사용합니다. 중심 이동도 하고, 허리의 회전도 사용하고, 견갑골이나 고관절도 쓸 겁니다. 얼굴 표정이나 호흡도 바뀝니다. 온몸이 동시다발적으로 지극히 복잡한 행동을 취하는 겁니다. 인간은 불쾌감을 피하려 할 때, 가장 정확한 반응을 보입니다. (중략) 그런 능력을 운동 능력이나 신체 능력이라고 하기에는 좀 위화감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는다면 감수성이겠지요. -p102~103

인간의 첫 공생 대상은 자신의 신체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체와 공생하는 힘, 능력, 기술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09

공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자기는 여기 있고 타인이 옆에 있어서 그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전 공생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생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또는 인간과 신체의 관계입니다. 틀에 박힌 삶을 유지하면서 똑같은 일상을 매일 반복하면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변화들을 놓치지 않는 겁니다. -p112~114

없던 것이 생기는 경우는 쉽게 눈에 띕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는 경우는 변화는 관찰력이 어지간히 좋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렵습니다. -p.111

자신의 내면에 풍부한 개성의 단편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이윽고 성숙한 시민이 되어 다양한 문화권으로 부터 찾아오는, 다른 사회에서 방문하는 타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127


우치다 선생님이 [완벽하지 않을 용기] 전반에 걸쳐 이야기하려는 것은 결국 아이들에게 다양한 환경과 의견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며 실패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어른이라는 위.치.에 있는 우리 교사와 부모가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등급을 나누는 교육정책, 일류대 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 이 일류대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도 책 전반에 걸쳐 사회 경제 정치 역사적 관점에서 꽤 원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 공업 사회식의 메타포로 교사와 아이들의 실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에 대해 우치다 선생님은 무도의 철학과 농업사회의 롤모델을 제시한다. 


공장 생산과 농업생산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공장의 경우, 생산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완성품의 사양이 결정됩니다. 모든 공정을 완벽하게 관리할 있는 상태가 공업의 이상적인 형태죠. 농장물의 경우 다양한 자연현상, 기후 변화나 병충해 등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생산 과정이 흐트러지게 마련인데 농업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이런 부분이 공업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종의 버그입니다. 공업 생산 모델을 학교교육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교육에는 아이의 가정환경이라든지 교우관계, 사회 상황이나 경제, 사상, 종교 등 다양한 외적 요소가 여전히 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아이들이 정해진 공정으로부터 탈선하는 일이 곧잘 일어나겠죠. 공업 생산의 메타포에서는 이런 아이를 '불량품'이라고 부릅니다. 예측 불가능한 농업과 달리 공업에서는 생산 시작 시점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공정을 관리해야 하므로 중간 과정에 관여하는 요소는 최소화해야 할 버그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상품이라면 몰라도 살아 있는 생물,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 어느 쪽의 메타포가 더 적합할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p268~269

3년쯤 전, 스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스키 탈 때는 정확한 위치에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선생님, 올바른 위치는 어디입니까?"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올바른 위치란 언제든 올바른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중략)
'올바른 위치란 다음 동작에 대한 가장 많은 선택지를 가진 위치이다'입니다. 다음에 취할 수 있는 동작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내포한 장소, 가장 많은 동선을 취할 수 있는 위치. 다시 말해 가장 자유로운 위치가 옳은 포지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215

이 같은 능력은 학교교육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개발해야 할 능력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습득해야 할 능력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와 때, 해야 하는 일을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체득하는 능력입니다. 
(중략)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선택지가 많은 삶을 살 때 가장 자유로워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실감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중략)
상당히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을 들여 체계적으로 훈련시켜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하려면 아이들에게 행동의 선택지가 가장 많은, 선택할 수 있는 동선이 가장 많을 때 살아 있음을,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실감하게 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연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 수행을 통해 비로소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을 여러분이 꼭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p216~219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번 책모임에 모인 분들 대부분이 학부모였고, 그중에는 교육계에 종사하는 분들도 계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완벽하지 않을 용기]는 책모임에 참석한 모두에게 참 고무적이고 위안이 되는 책이었다. 강연 내용 중 우치다 선생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저 멀리 외국에서 왔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딱 그랬다. 물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보다는 공감이 되고 새로이 알게 된 내용들이 더 많아 머리로 마음으로 충족되는 부분이 컸다는 것은 위에 정리한 내용을 보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굳이 얘기하고 있다.


책모임을 하는 내내 학부모들이 답답해하는 부분은 단 하나였다. 

"그렇다면 선생님, 학부모 된 우리 입장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건가요? 알고는 있지만 그게 너무 힘들어요. 답을 주고 싶고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 어디에도 답이 없어요." 하는 내용이었다. 


학부모라면 어우~ 완. 전. 공. 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학보모들의 그리고 교사들의 질문을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을까. 친절하게도 우치다 선생님의 강연을 일일이 쫒아다니며 통역사로서 미래 교육의 뜻을 함께한 박동섭 통역사께서 우치다 선생님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우치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모항이 있는 배가 가장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다.


모험 여행을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것은 돌아올 장소를 갖고 있어서다. 여행과 모험으로 성숙을 이룬 사람들이 자신의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항을 통해서이다.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자신이 어떤 인간으로 거듭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모항에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작 우치다 선생은 항구를 떠나는 모험가라는 정체성이 기질적으로 맞지 않아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구에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자시를 조형해왔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스승의 역할을 '정점定點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이 얼마만큼 바뀌었는지, 어떤 변화를 이루었는지를 확인할 '정점관측점'이 있으면 사람은 안심할 수 있는 법이니까. 모험가가 위기적 상황에서 사력을 다하고 있을 때나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돌아가야 할 모항'이라는 이미지는 마지막으로 믿고 의지할 곳이기 때문이다. -p324~325 


모.항. 


나는 어떤 모습의 모항이 될 것인가. 아이에게 보물섬으로 가는 항로는 하나뿐이라고 몰아세우며 암초가 가득한 바다로 떠미는 모항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모험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뜻밖의 섬이 나에게는 하나뿐인 보물섬이 될 수도 있으니 눈을 크게 뜨고 암초를 경계하며 다양한 항로로 모험을 떠나보라는 모항이 될 것인가. 


전자에는 단 하나의 대답이 있고, 후자에는 답이 없지만 그것이 단 하나의 정답이라는 것을, 

말로는 다하지 못할 만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상의 모든 부모 된 자들, 교사 된 자들이라면 이미 마음속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제대로 발음이 되는 ^^ 우치다 타츠루의 [완벽하지 않을 용기], 완독을 추천한다. 


저자 우치다 타츠루/ 옮긴이 박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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