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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구원이 있는 책



 1Q84를 다 읽는데 2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물론 소설의 뒷이야기가 간격을 두고 나온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책을 틈틈이 읽을 시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마지막에 가서는 번역을 끝내서 읽을 시간이 많아졌었다. 사실 지금도 하루키의 소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태엽 감는 새" 등 대개 초기작들이다. 그 이후의 "카프카의 모험" 이라던지 "어둠의 저편"은 어쩐지 내 감성에는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었다. 반면 후기작으로 꼽히긴 하지만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 수록된 단편들은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10년이 넘도록 읽어 본 후에야 정의를 내린 것이지만, 두 가지 큰 주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형식인 것 같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톱니가 자아 찾기고 자아 찾기에 맞물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부수적인 톱니가 바로 현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권력이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어두운 권력은 그 구조와 스토리가 치밀하게 얽히고설켜서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블랙홀 같다. 반면 자아 찾기는 바닥이 마른 우물과도 같다. 어떤 연유인지 스스로 우물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칠흑과도 같은 우물 속 어둠을 적낙라하게 비춰주는 밤하늘의 둥근 달빛을 보며 혼란의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졌다가 한낮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절망하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스며들어온 지하수에 목을 축이고 결국에는 누군가의 또는 무언가의 도움으로 우물 밖으로 나온다. 우물 밖의 세상은 그 전의 세상과 별 다를 것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다. 주인공은 이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고 그것은 절대로 잃을 수 없는, 잃고 싶지 않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하루키 문학에서 이 우물은 큰 벽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그것은 숲의 가장 가장자리에 우뚝 서있는 벽으로 묘사가 되어 있고 "태엽 감는 새"와 "상실의 시대"에서는 우물 그리고 이 "1Q84" 에서는 도큐선 역으로 갈 수 있는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이다.

 하루키 문학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아를 찾는다. 완전하게든 불완전하게든 자아를 찾기는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변수라는 여운을 독자들에게 남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자아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자기가 처한 현실에 따라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문학에 등장하는 자아는 언뜻 보면 절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을 찾은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언제든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긴다.  반면 권력은 그렇지 않다.


 하루키 문학에 등장하는 권력은, 어두운 권력은 절대로 변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움직임에 따라 모습을 감추거나 또는 사라지는 듯하다가 결국 어느 시기에 다시 발현한다. 모습을 감춘 것뿐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루키는 소설 속에 어둠의 실체를 언제나 남겨둔다. 때로  힘을 잃고 웅크리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더 큰 힘을 발현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정의나 개인의 순결한 자아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하루키가 노린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절대 진리가 아닌가 싶다. 1Q84에 등장하는 어둠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는 결국 두 손을 꼭 잡고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통해 저쪽 세계로 넘어가지만 이쪽 세계에는 여전히 두 개의 달이 떠있고 선구가 존재하고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다마쓰가 있다.  언제 어디서 이 계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이 저쪽 계로 넘어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1Q84는 내가 꽤나 오랫동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풍의 글을 기다려왔던지라 사실 아주 반가운 소설이었다. 처음 도입부에 등장한 덴고의 환각부터가 몹시나 마음에 들었고 그 부분의 묘사는 약간 하루키의 단편 "구토"를 연상케도 했다. 게다가 덴고가 리라이팅 작업을 하면서 묘사한 '공기 번데기'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고양이 마을' 이야기까지 흡사 하루키가 "태엽 감는 새"의 작업을 다시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듯 그 장면이 실제로 느껴졌다.  읽는 내내 내가 그 세계에서 그 장면을 몰래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독자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도록 만드는 하루키의 글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는 그의 뇌구조가 소름 끼칠 만큼 부럽고 절망하게 된다. 그의 책을 한 권 마칠 때마다 나는 그가 과거에 냈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손에 펼치게 되고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아아' 하고 감탄을 해버리게 되고 만다. 하루키는 나의, 그러니까 말하자면, 연인이다. 하루키 본인에게는 외람된 말이겠지만. 죄송합니다 하루키 씨.



"그런데 아오마메 씨는 두렵지 않아?"

"이르테면 어떤 것이?"

"어쩌면 그 사람을 영원히 못 만날지 모르잖아. 물론 우연히 재회할 수도 있지.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끝까지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잖아? 게다가 만일 만났다 해도 그 사람은 이미 결혼했을 수도 있고. 아이가 둘쯤 딸려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잖아? 만일 그렇게 되면 아오마메 씨는 그 뒤의 인생을 내내 외톨이로 살아가야 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자기가 좋아한 사람과 맺어지지도 못한 채.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렵지 않아?"

아오마메는 잔 속의 붉은 와인을 바라보았다. "두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설령 그 사람이 아오마메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15장 기구에 닻을 매달듯 단단하게  중에서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게 사랑이라는 점이.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점점 잊고 살게 되는데, 이 부분을 읽고 나를 구원하는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내 사랑에는 여러 가지 색과 맛이 있었는데 정작 나는 타인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를 구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한 것은 내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고(있고,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쭉 있을 것이고), 나는 아오마메를 통해 잊었던 그 기분을 다시 되찾는다.


약간 암울하긴 하지만 적어도 인생은 지옥은 아니다라고 한 아오마메처럼.


사진출처 : 픽사베이 csli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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