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에 MZ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화'라는 말을 좋아했다. 홀로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비슷한 사람끼리 뭉치고,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로 돕고 힘을 모아 살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이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의 사회화는 선망, 욕망, 절망 도망, 실망처럼 ''망'으로 끝나는 말들로 가득했다.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누군가가 만든 기준과 가치 속에 허우적거리는 내가 있었다. 그때부터 사회화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사회화란 이름으로 나의 삶에 관여하는 걸까. 사회화는 '망'으로 끝나는 여러 말들, 'X망' 속에 '나'를 잃어가는 폭력의 연속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사회화라는 알을 깨고 나와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까.
- 'X망 세상'에서 살아남기 중 (김기수)
자본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도 가치를 숫자로 증명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은 인적자원이 되었고, 교육은 학생들에게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학교는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곳이 되었다. 실패하는 사람은 노력이 부족한 사람의 다른 말이었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은 도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사노동도 온전히 자신의 몫인 사람과 그 모든 것이 타인에 의해 충족되는 사람의 시간은 같을 수가 없다. 물리적으로 하루 24시간이라는 점에서는 같겠지만, 그 점이 오히려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 가난은 책임져야 할 일이 많음을 뜻하고, 그 책임에 비례하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를 타고나는 것도 스펙이고 그러한 운이 따라주는 것도 실력이라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공정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한 것들이 불공정을 정당화하는 게임에서 우리는 포기를 반복하며 살아갈 것인가.
86세대, X세대는 그 이름의 시작이 어찌 되었건 당사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집단적 정체감을 형서하였다. 특히 86세대는 그러한 정체감을 바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주류세력이 되었다. 반면, 청년세대를 향한 무수히 많은 이름들은 주로 86세대들에 의해 해석되고 명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을 정치적 소비자로 객체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름표라기보다 기득권이 달아준 꼬리표인 것이다.
청년이 시대의 화두라지만 정작 청년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구체제의 버스가 떠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청년이 겪고 있는 문제는 청년세대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이 빗어낸 결과이다. '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청년들을 두고 '힘드니까 무엇을 해주겠다.'는 식의 땜질 처방은 구체제에 대한 연명치료이며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종말로의 초대 중 (박석준)
나조차도 중학생 때부터 EBS를 포함한 인터넷 강의를 주로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당연히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비대면 강의 계획을 마련해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면담 시작 직후 내 앞으로 제출된 '비대면 강의 계획안'을 보고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교수의 강의 내용 음성 녹음 파일과 PPT 파일 제공'이 첫 번째로 적힌 학교의 자랑스러운 계획이었다.
그날 면담에서 학생들이 이야기할 시간은 주어졌지만 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한 학생대표들의 의견을 듣고 계획을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되지 않아 교수들에게 그 계획안 그대로 비대면 수업 방식 공지가 보내졌다..... 나는 늘 우리 학생회 집행부 친구들이 수많은 데이터와 분석을 토대로 만든 기획안과 아이디어를 갖고 학교를 찾아갔지만, 학교는 '학생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며 반려시켰다.
그해 10월 나는 부총장으로부터 "네가 시장잡배냐?"라는 말을 들었다. 학교 집행부와 학생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인 회의에서였다.... 그 부총장은 눈을 부릅뜨고 내게 "너 정치하냐?"하고 물었다. 오히려 부총장에게 '정치의 의미를 알고 내게 말한 것이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괜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때 총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교수가 학생에게 어디 반말할 수도 있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른들에게 또 한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강의실이 아닌 학교 행정과 정책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이 테이블에서 강의실 위계질서를 그대로 가져온 총장, 부총장 포함 대학 처장단의 낡은 사고방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였다. 그분들의 머릿속에 학생들은 그저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피교육자일 뿐, 대학에서 어떠한 의제에 대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동등한 주체로 인식되지는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수씩이나 되는 지성인들이, 또 과거에 우리와 같은 나이로 살아갈 때 독재정부에게 민주화를 요구했던 이들이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것이 이상하고 또 수상했다.
-학생회장으로 마주한 대학의 민주주의 중 (김나현)
오랫동안 '경쟁≒노력"이라는 명제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근데 책을 보면 볼수록 세상을 알면 알수록, 저 공식은 그저 불공평의 정원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임을 깨달았다. 그들이 말하는 경쟁, 즉 시험 선발은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데다가 효율도 아주 나쁜 제도였다. 그러나 이미 시험 선발로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이 사실을 애써 부인했다. 그 혹세무민의 끝을 느낀 사건이 바로 공공 의대 사건이다. 그때 의료인 숫자를 늘리자는 이야기에 반박하는 의사들과 엘리트들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없는 사람들이 참아야 하는 이유'는 언제나 단순했다. 노력 부족, 개인의 재능, 시장성 없음 등이었다. 반면 '있는 사람들이 양보해야 할 때'는 온갖 복잡한 논리가 난무했다. 그들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명백한 사실 하나는 깨달았다. 바로 저들은 애초에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는 것. '내 말을 못 알아듣겠지? 그런 닥치고 우리말에 따르기나 해라.' 건전한 논쟁이 아니라 전문 지식으로 찍어 누르려는 그 오만한 모습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여기서의 공정은 명문대와 대기업의 좁은 문을 두고 다투는 경쟁을 긍정하면서 출발한다. 공정론의 핵심은 '경쟁이란 곧 필연이니 차라리 모두들에게 똑같은 룰을 적용시키자!'다. 여기서 사용된 공정이란 단어에 따르면,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불공정 행위가 된다. 농어촌 전형, 여성할당제, 장애인 채용, 국가장학금, 지역전형,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모두 반칙과 특혜로 몰아붙인다. 그들의 얼마 안 되는 할당 몫까지 몽땅 경쟁의 장으로 가져오라며 윽박지른다.
이러한 공정론이 왜 지지를 얻었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표준 취업 경로는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이 대표하는 15%의 성 안으로 입성하는 걸 전제로 만들어져 왔다. 즉, 애초에 대다수가 들어가지 못할 직업세계가 기본값이라는 뜻. 이 15%의 직장의 공통점은 연공급제를 통한 임금 상승과 고용보장을 동시에 누린다. 경력을 쌓아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다. 반대로 85%의 성 밖은 아주 가혹하다. 월급은 최저임금에서 맴돌며 비정규직으로 온갖 일터를 전전한다. 경력 대신 나이만 쌓여간다. 이럴진대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 선발의 공정에 안 민감할 수가 없다.
문제는 시험 룰로 옥신각신하는 한 줌짜리 공정 따위가 아니다. 불공평이 너무 오랫동안 쌓여 잘못된 구조 자체를 망각하는 게 진짜 문제다. 절반조차 살아남지 못하는 가혹한 불평등 구조. 이 구조를 정당하고 유포한 이들은 과연 누굴까. 멸 달 전 한강 의대생 사망 사건을 보며 확신했다. 대중들의 기이할 수준의 엘리트 선망은 언론이 부추긴 감정이었다. 물론 사람이 죽은 일이다. 안타까운 일 맞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나 공론화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차라리 사회 구조적인 문제랑 얽힌 청년 문제들, 수많은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들이 훨씬 공론할 가치가 있지 않나? 언론이 이 모양이니 지방대생도 복학왕의 이미지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사회 근간을 지탱하는 노동자들은 시장 가치가 아니라 일의 중요성만큼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위에서 말한 대표성 불평등도 개선해야 한다.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이 아닌 노동자들은 산재 사망 때나 소환된다. 구성원 비율로 보면 이들이 훨씬 다수인데도 소수자 문제마냥 다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필수 노동자들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고 질릴 만큼 문제 제기를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분들이야말로 힘들다고 말할 자격을 넘치도록 가진 분들 아니겠는가.
-경쟁하기 싫다 중 (천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