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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농담(弄談)이 한 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농담(濃談)


 

 농담(弄談)의 사전적 의미는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농담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농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데 특히 적절한 타이밍에 필요한 농담을 하는 사람은 기지가 넘쳐 보여서 나도 모르게 존경하게 된다. 지금의 나에게는 없는 퇴화돼버린 재능이기 때문이다.      


 신년 맞이로 대형서점에 방문했다. 그런데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들과 첫눈에 반해버린 책들을 모두 사기에는 비용이 너무 부담돼, 대로 건너편에 있는 중고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판매부수가 곧 인쇄 수입으로 직결되는 작가들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한 말이지만 –알다시피 중고책 판매 수익이 작가나 출판사에 돌아가는 일은 없다- , 마음에 드는 책이 출간될 때마다 책을 산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변명을 하자면 특히나 살림하는 아줌마한테는! 어떻게든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데 대개가 중고서점을 이용하거나 지인의 집에서 빌린다는 명목으로 가져갔다가 돌려달라고 하지 않으면 굳이 돌려주지 않는 책도둑이 되는 것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너무 느려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다 읽지도 못하고 돌려주는 경우가 많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신간을 사던가, 중고책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사던가, 지인의 집에서 스윽~ 은 아니고 정중하게 부탁해서 빌려온 다음 만년손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 책장에 만년 손님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결국 모두 본가로 돌아간 모양이다.     


 허지웅 씨가 던진 농담(濃談) 앞에서 사족이 길었는데,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오랜만의 서점 나들이에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서고 사이를 흐느적흐느적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문득 내 앞에 그의 책이 놓여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을 자기한테 들키기라도 했다는 듯이 진열대 위에서 짙은 남빛 망토를 두른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지 궁금하지?라고 말을 걸려는 듯이. 중고서점에서 만난 허지웅 씨의 책은 책싸개가 누락돼서 몰랐는데, 원래는 책싸개에 허지웅 씨의 모습이 크게 박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싸개가 누락된 책이 더 마음에 든다. 짙은 여백이 첫인상에서부터 허지웅 씨가 앞으로 우리에게 던질 농담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가볍지 않다, 라... 살고 싶다는 농담이 죽기 싫다는 절규보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더 깊고 무거운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궁금해져 그를 안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을 던지는 그의 마음이 얼른 엿보고 싶어 져서... 으음, 집에 가기 싫었는데... 짙은 망토를 두른 채 진열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살고 싶다고 농 아닌 농을 던지는 그 때문에 결국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망했는데.”

 세 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나흘째 되는 날 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책에 적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군, 모두가 잠든 밤에 침대 등받이에 베개를 세우고 앉은 채 오늘 밤은 어쩌면 밤을 꼬박 지새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의 농담을, 이야기들을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에서 허지웅 씨는,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버티고 몇 개월이 지났다."는 말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가 지나온 가장 어둡고 깊은 밤은 혹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케서린 번스 엮음/ 알마)와 결이 같을까, 벽에 난 작은 틈새로 남의 인생을 몰래 엿보는 기분이 되어 책장을 넘겼다. 앞서 읽었던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와  「죽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글/ 마음산책)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와 '삶'을 보고 울고 웃고 슬퍼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의쌰하고 힘을 냈던 것처럼 이번 허지웅 씨의 농담에서도 그런 힘을 얻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벗어지지 않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어서...      


 허지웅 씨가 던진 농담에서 가장 마음에 스며들었던 이야기는 대개 앞장에 나왔던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그가 악성림프종이라는 죽음과 대면하면서 경험했던 '천장과 바닥', 병이 호전된 후에 요가를 시작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의 의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천장과 바닥을 경험했던 그 밤에 그는 살기로 결심하면서 수줍은 간호사가 짜준 털모자를 떠올린다. 자신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결론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것을 한없이 사소한 소음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서점엘 갔다가 주차장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접촉사고를 내버린 일과, 불행한 일을 겪을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한 가지 단어와 관련해서 풀어낸 이야기,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과 ‘만약에’에서는 라인홀트 니부어의 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허지웅 씨가 살고 싶다는 농담을 하게 된 건 아마도 ‘당신 인생의 일곱 가지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일곱 가지 장면에서 뿐 아니라, 책 전체에 걸쳐 그가 이런 농담을 우리에게 던지게 된 이유가 나와 있다.      


나는 여태 내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말이다. 백 명의 관객 가운데 두 명밖에 웃기지 못한 실패한 농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이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장면을 꼽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입체적이다. 이야기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적어도 애정을 가지게 되는 종류의 캐릭터 말이다. 일곱 가지 장면을 꼽는 일은 내 삶을 이야기로, 나를 캐릭터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다.
     

 여태 자신의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하고, 단지 일곱 가지 장면만으로 자기 삶에 이야기가 생기고 스스로가 캐릭터가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한 순간에 허지웅이라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이야기 듣기를 정말로 좋아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들을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지금의 나에겐 별달리 들려줄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자석에 끌리듯 이야기가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그의 의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마도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던 나의 셈은 틀렸다.’에서와 ‘8층으로 돌아가다.’를 읽으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8층으로 돌아가다.’에서 들려준 최은희(가명) 어머니의 이야기와 어머니를 문병했던 그의 마음이 맞닿아서 이건 정말 아름답구나, 허지웅 씨 잘했어요, 조연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인생에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군요, 이건 아마도 당신이 살고 싶은 또 다른 농담이겠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는 환자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죽음을 준비하라는 따위의 말은 좀 조심해서 했으면 좋겠고 환자는 아무리 미궁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고 답답해도 다른 길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병원과 의료진이 시키는 대로만 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꼭 잡는데 힘이 느껴져서 좋았다. 면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시켜서 엄지손가락도 올리고 포즈를 취했는데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격정적이며 값비싼 것보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방향감각이 생기고 등이 곧게 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년이었을 때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최은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사람 최은희’에서 막을 내리지만, 어쩌면 허지웅 씨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또 다른 인생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더 농후한 농담으로써 삶을 계속해서 살아나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삶과 죽음이라는 수수께끼를 양쪽 어깨에 하나씩 이고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인생에 새겨지고 함께 살아나가게 될 최은희 어머니의 이야기를 응원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허지웅 씨 자신의 이야기는 ‘보통사람 최은희’에서 막을 내린다. 그의 인생의 장면 장면들을 더 들려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 대신 영화와 영화인, 작가들, 배우와 정치가, 종교인들의 이야기로 삶의 농담을 채운다. 오랫동안 영화전문지와 텔레비전 토크쇼 패널로써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삶에 대한 신념을 지식으로써 전달한다.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던 나의 셈은 틀렸다’ 이후로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전쟁’에서 그는 두 작가의 이야기에 빗대어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라고 말하고, ‘선한 자들이 거짓말을 할 때’와 ‘우리는 언제나 우리끼리 싸운다’에서는 종교인들의 편협한 마음과 국가 폭력이 낳은 자아의 붕괴와 회복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허지웅 씨가 삶과 죽음을 지식으로써 전달하는 중반부 이후의 이야기들은 처음에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섬세한 필력과 방대한 지식에 휩쓸려 몇 개 장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그곳에는 허지웅 씨의 의식만 있을 뿐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책을 읽다 말고 문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공허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후반부에 이어지는 그의 글은 아름답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치열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가 걷힌 뒤에 부드러운 서풍 속에서 보게 되는 날 것 그대로의 삶 대신 아름다운 액자에 반듯하게 박제된 삶이 들어있었다. 아름답고 고개가 끄덕여져서 집에 가져와 벽에 걸어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벽에 걸려있는지도 모르는 그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아름다운 액자 속에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그림이 있다면 아마도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에서 보여준 니체의 이야기와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에서 보여준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죽기 전에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습니다. 이제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네가 아무리 추악한 결론에 이르러 있더라도 아직 그것은 삶의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그것을 이루려면 피해의식으로부터 결별하여 마침내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니체의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앞서 소개했듯 니체 또한 앞선 오스카 와일드의 사연처럼 시련을 겪고 피해의식에 파묻혀 숱한 편지를 섰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했다.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 허지웅 씨는 영화 <스타워즈>에 삶을 빗대며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스타워즈>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삶에 평화와 균형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제다이가 말하는 포스의 정수란 다름 아닌 균형이다. 이는 기계적 무게중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그것이 포스가 말하는 균형이다. 언젠가 반드시 여러분의 노력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말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끊임없이 가다듬고 정진하고 버틴다면 반드시 그날이 온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듣지 못했던 말을 모두 털어냈다. 나는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포스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라며.   

살아라.
   

 허지웅 씨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던지며 자신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이 아름다운 청년이 –물론 그의 신체나이가 40대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40대가 넘은 사람들 중에 자신은 아직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 농후한 농담 속에서 스스로에게 결심한 것은 무엇일까.  밤을 지나 다시 하루 반나절의 시간이 지나고, 일요일은 마음껏 늘어져도 괜찮다는 명목으로 꾀죄죄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천천히 넘겨 읽다가 문득 하나의 단락에 손과 눈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광장에서 마부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말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쓰러진 뒤 완전히 미쳐버린 니체의 마지막을 떠올릴 때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난다. 아마도 평생 동안 마부에게 채찍으로 맞아왔을 말을 보고 그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런 삶조차 긍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에 관해 생각하며 그는 대신 맞아주기 위해 말을 감싸 안았던 것이다. 울다가 혼절하고 미쳐버린 것이다. 영원회귀고 아모르파티고 위버멘쉬고 그냥 아무 말이나 떠들어댔던 게 아니라 그 길에 이르는 처연함에 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가 이때 미치지 않았다면 분명히 개인들이 서로의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 대신 맞아주며 연대하여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으리라 생각한다.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가운데  
    

 허지웅 씨가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지나 죽음이라는 단순하고도 거대하며 폭력적인 결론 앞에서 눈을 돌려 다시 살아야겠다는 농담 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니체의 이 말속에 들어있는 게 아닐까. 영원회귀로 반복되는 삶이라는 처연한 수레바퀴 속에서 삶과 그 삶 속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누구보다 예. 민. 하게 공. 감. 하고 연. 대. 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이제 더 이상 최은희 어머니의 가족들을 위해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포즈를 취하는 일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지나온 그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에게 포스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소년 같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가족들을 위해 포즈를 취한 그 스냅사진과 그의 농담 속에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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