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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넘 Feb 20. 2017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너의 이름은>

영화 읽기 (1)

두 주인공은 몸이 바뀌는 특수한 사건으로 인해 인연을 맺는다. 어느 날 이후 더이상 몸이 바뀌지 않자, 남자 주인공 타키'는 여자주인공인 미츠하를 찾아가기로 한다. 천신만고 끝에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이에 공간뿐 아니라 시간의 구멍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만의 은밀한 사건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쿄의 타키, 이토모리의 미츠하뿐 아니라 미래의 타키, 과거의 미츠하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정되어 있는 운석과의 충돌에서 미츠하네 마을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한 여름밤의 꿈같았던 그 사건은 그야말로 꿈처럼 잊혀지고, 두 주인공도 점차 서로를 잊어버린다.


장르적으로 재난, 로맨스, 판타지까지를 아우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제목이 강조하듯, 이름에 관한 영화다. 극중 여러 번 등장하는 특별한 이름 붙이기는 '황혼', '시간', '무스비(매듭묶기)', 나아가 '인연'에도 적용된다. 이 개념적인 정의는 표층의 내러티브에서 주인공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또 물어보는 사건과도 층층이 겹쳐 있다.


'황혼'은 낮도 밤도 아닌 환상의 시간이다. 때문에 옛날부터 '뉘신지'와 같은, 이름이 아닌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미래와 과거에서 출발한 두 주인공이 만나는 시간 또한 황혼의 시간이요, 이름 붙일 수 없는 환상의 시간이다. 주 소재로 등장하는 매듭묶기, '무스비'는 신과 인간을 잇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다. 이 또한 명확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연결, 신과의 연결, 또 다른 사람과의 연결 등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매듭묶기'라고 부른다면 그 이름 뒤에 무한에 가까운 공백이 생겨버린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것, 언어로 꺼낼 수 없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 무수히 많은 신화, 종교, 민담, 설화는 그 힘으로 탄생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는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이야기 속에서 부여받은 이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거스를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됐다. 망각을 거부하며 계속해서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부르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노력은 이 생명력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 인식의 세계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념을 끄집어내 현실의 층위로 내려놓는 힘은 다름아닌 이름에 있다. '이름 붙이기'의 마력은 이렇게 생명을, 존재의 현시(顯示)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름은 공백을 만든다. 언어가 안고 있는 슬픈 한계이기도 하다. 이름은 무언가를 대표하는 표지일 뿐 그 뒤에는 가려진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 두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과 존재를 잊은 것은 꿈과 같은 '환상의 시간'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이름을 잊었기 때문에, 이름에 가려진 그림자의 세계를 탐험할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넘어서는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 후에야 나에게 꽃이 되는 존재보다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이름을 알 수 없어도 나에게 운석처럼 박히는 존재.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존재자가 되기를 꿈꾸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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