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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넘 Dec 17. 2023

No Crying은 눈물의 주문-<프렌치 디스패치>

영화 읽기 (11)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은 특유의 영상미로 잘 알려져 있다. 수평계와 비율자로 구성한 것 같은 정교한 화면과 원근감이 없다시피 한 납작한 촬영,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 파스텔톤 색채가 그의 특징이다. 어느 순간에 스냅샷을 찍어도 그대로 엽서가 될 것 같은 미장센은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챌 효과적인 도구다. 반면 스토리 텔러로서 그의 역량은 이 아름답고 철저히 계산된 미장센에 다소간 가려져왔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이야기보다 화면의 구성에 더 치우쳐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였다. 그간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캐릭터는 살아 움직이는 한 명의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컬러 도판 또는 연극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예쁘장한 종이 인형처럼 보였다. 화면의 톤과 연출 탓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톤이 감정을 외부로 발산하기보다 안으로 누르는 방식이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아서가 No Crying이라고 말할 때는 무언가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도판처럼 납작한 화면이나 단호한 어투, 담담한 연기는 그대로인데 무엇이 달라졌기에 눈물 금지라는 대사가 오히려 눈물짓게 만들까?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의 배경은 20세기 초 프랑스, 앙뉘라는 가상의 공간이다. 이 영화는 50년간 발행된 동명의 잡지가 발행인 아서 하위처 주니어의 사망 후 그의 유언으로 폐간을 맞는다는 설정 아래, 네 기자가 쓴 <프렌치 디스패치>의 기사 내용과 그 기사를 쓴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기사를 쓸 당시의 그들은 몰랐지만 아서의 검수를 받은 마지막 기사이자, 폐간호의 기사가 될 것이었다.


네 기자인 허브세인트 세저랙(오언 윌슨), J.K.L. 베렌슨(틸다 스윈튼), 루신다 크레멘츠(프란시스 맥도맨드), 로벅 라이트(제프리 라이트)는 각각 지역 섹션, 예술과 예술가 섹션, 정치와 시 섹션, 맛과 냄새 섹션을 담당했다. 아서가 좋은 기자인 그들을 아끼고 맹렬히 비호했다고 영화의 나래이션은 담담하게 알려준다.


개괄 역할을 하는 세저랙의 <300 단어로 이루어진 도시 스냅샷>은 공간적 배경인 앙뉘를 소개한다. 250년의 역사를 가진 앙뉘는 프랑스의 어딘가를 꼭 빼닮았지만 아름답지만은 않은 도시다. 소매치기 골목과 매춘 골목이 있고, 쥐와 고양이가 지하철역과 지붕 위를 점령했다. 강물은 더럽고 매주 8.25구의 시체가 떠오른다.


<콘크리트 걸작>은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모세 로젠탈러가 간수이자 뮤즈인 시몬을 만나 다시 붓을 잡고 세기의 예술가가 되는 이야기다. 아트딜러로서 감식안을 갖고 있던 또 다른 죄수 줄리안 카다지오는 삼촌들과 함께 큰 돈을 들여 그를 소위 '잘 팔리는' 예술가로 만들어낸다.


크레멘츠의 <선언문 개정>은 프랑스 68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앙뉘의 학생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이었지만 학생들은 곧 모든 기성 체제에 반대한다. 최루탄이 자욱한 도시에서 크레멘츠는 학생운동의 구심점 격인 제피렐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 그의 선언문 개정을 도우며 운동과정을 기사화한다.


액자 안 마지막 이야기인 <경찰서장의 전용 식당>은 다시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기자인 로벅 라이트는 한 TV쇼에서 진행자의 질문을 받아 과거에 썼던 기사, 즉 경찰서장의 식당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읊어주는 동시에 아서 하위처 주니어를 만나게 된 날을 회상한다. 이에 따라 관객은 TV쇼 상황과 기사의 내용, 그리고 로벅 라이트와 아서가 만나는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게 된다.



로벅 라이트의 회상으로 등장한 아서는 동성애 혐의로 구금당한 로벅의 보석금을 내주며 즉석에서 채용면접을 보고 그를 채용한다. 연고도 없고 구해줄 사람도 없이 독방에 구금된 로벅은 기대치 못 한 따뜻한 호의,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데 감동하지만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보고 아서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한다. "No Crying"


아서의 사무실 문 위에는 'No Crying'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앞에서는, 그의 사무실에서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이 짧은 슬로건은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관객이 이 대사를 육성으로 듣는 것은 로벅의 이야기에 다다랐을 때다. 이 대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아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기 때문이다.


아서는 잡지인 <프렌치 디스패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람이자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의 출발점도 아서다. 이 영화가 액자 속 많은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고자 한 것은 아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일군 <프렌치 디스패치>가 어떤 잡지였는지다.


사실 발행인 아서 하위처 주니어는 네 기사, 그러니까 액자 속 단편 이야기 각각이 끝난 뒤 해당 기사를 피드백하는 방식으로 매번 등장했다. 그 비중은 점점 커져 첫 번째 지역 섹션에서는 두어 가지 첨언을 했을 뿐이지만 두 번째 섹션에선 기사를 쓰는 데 들어간 호텔비와 식비 등 각종 비용에 대해 불평하고, 마지막 섹션인 로벅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그가 기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존중하고 아끼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서가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로벅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기꺼이 경찰서에 가서 보석금을 내주고 일자리를 제안한 것은 그의 글 때문이었다. 로벅의 성정체성이 무엇이든, 어떤 혐의로 구금되었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아서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사실은 로벅이 글을 어떻게 쓰는지 안다는 것이었다.



로벅이 그의 기사 <경찰서장의 전용 식당> 초고에서 너무 슬퍼지는 탓에 삭제했다는 대화를 듣고 아서는 삭제된 부분이 가장 좋다며 ‘그게 바로 이 이야기가 쓰여져야 하는 이유’니 삭제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말하자면 이 대화에는 다른 데에는 없던 무언가가 있고, 그 때문에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될 수 있다. 한편 자신을 슬프게 만든다는 대화에 대해 말하는 로벅은 정작 크게 슬퍼 보이지 않는다. 


삭제된 부분에서 네스카피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라진 뭔가를 찾아 헤매고, 두고 온 뭔가를 그리워하죠’. 로벅의 대답은 ‘운이 좋다면 잊은 것을 찾을 겁니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네스카피에는 작게 고개를 젓는다. 로벅은 경찰서장의 식당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만난 독방 수감자에게서, 네스카피에에게서 성소수자, 외국인, 이민자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로 인해 눈물흘리는 대신 로벅은 그것을 글로써 담아냈다. 


아서가 팻말까지 만들어 붙일 정도였던 No Crying은 이런 뜻일 테다. 슬픔이나 기쁨, 고통, 감동,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이 눈물짓게 만드는 바로 그 무엇을 눈물로 흘려보내지 말고 어딘가에 담으라는 것. 로벅의 경우 독방에서 흘리지 않은 눈물은 눈물이 아닌 다른 형태의 무엇이 되어 아서에게 전해졌다. 아서가 로벅의 이야기에서 찾은 가장 좋은 부분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No Crying은 눈물의 주문이 된다. 그가 No Crying이라고 말할 때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은 그것이 아서가 최선을 다해 작가를 존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No Crying'은 총 세 번 등장한다. 프롤로그에서 한 번, 로벅의 이야기에서 한 번, 부고 기사를 쓸 때 한 번. 로벅의 이야기가 끝난 직후 영화는 현재 시점, 아서의 시신이 뉘여 있는 사무실로 돌아온다. 후주인 쇠락과 사망 섹션, 기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아서의 부고문을 공동집필한다. 한 문장씩 돌아가며 아서의 생애를 읊는다. 기자들이 읊는 그의 생애는 영화 초반 들었던 나래이션이기도 하다. 마지막 대사는 '이 다음은 어떻게 되죠?'


카메라는 그대로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와 다음 내용을 토론하는 기자들을 비춘다. 아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에게 받았던 존중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기자들 사이, 구석에 서 있는 크레멘츠가 몰래 관객과 눈을 맞춘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 이야기의 가장 좋은 부분은 어디인가요? 이 이야기들에서 당신의 무엇을 발견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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