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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넘 Jun 20. 2019

문명의 서사-<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영화 읽기 (3)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은 살해된 아들 '호크'의 복수를 하기 위한 아버지 '글래스'의 여정을 따른다. 배경은 서부 개척 이전인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이 지점에서 전체 서사가 어떤 성격일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터 악역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핏츠제럴드'는 인디언 유색인종인 호크와 그 아버지 글래스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이 인종차별은 과거 한 인디언 부족에게 붙잡혀 고초를 당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적인 상황 자체가 인종 차별이 당연한 시대이므로 딱히 유별나지 않은 생각이다. 그리고 피츠제럴드보다 더한 혐오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제시된다.


피츠제럴드 뿐 아니라 글래스의 동료로 등장하는 대위, 브리저 등은 모두 백인 혹은 현대인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위는 법과 정의를 믿는, 혹은 그러고자 하는 인간상. 브리저는 양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에 따라 행동할 용기는 갖지 못한 아마 거의 대다수의 소시민. 피츠제럴드는 일말의 양심조차 갖고 있지 않으며 돈과 같은 '가치있는' 것만을 신봉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는 유형.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피츠제럴드에 대한 글래스의 복수지만 이 굵직한 씨실에는 인류 문명과 그에 따르는 혐오와 폭력이 여러 가닥의 날실로 교차하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개인의 복수극이 아니라 거시적인 문명의 역사다.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자본의 논리 아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 전반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죽음과 삶, 그리고 종교와 폭력이다. '레버넌트(Revenant)는 '망령,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 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비단 글래스가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피츠와 대위, 브리지 등도 그러하고 글래스에게 도움을 주는 무명의 인디언도, 프랑스 군인들에게 납치되었던 인디언도 그렇다. 그러니 영화의 제목인 '레버넌트'는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억압받아온 모든 인간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했던 메타포는 종교다. 문명의 역사가 곧 종교의 역사이기도 할 정도로 종교는 문명과 쌍둥이다. 종교와 신의 이름은 문명과 미개를 구분짓고 자신 아닌 다른 것을 타자로 상정해 배타적으로 개화하는, 일종의 낙인을 만드는 데 쓰였다. 피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인디언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아무 대가 없이 글래스에게 도움을 베푼 인디언은 '나는 미개한 야만인이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비참하게 나무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 뒤 이어진 장면은 타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한 프랑스 군인이 되려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는 장면이다. 감독은 극명한 대비로 그런 구분이 얼마나 얄팍하고 무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문명은 선한가? 소위 '발전한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잃은 것은 무엇이며 그 뒤에 존재하는 어두움은 얼마나 거대한가? 이 영화는 역사와 문명이라는 인류의 거대한 줄기에 무엇이 얼마나 매몰되었는지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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