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전과 막걸리, 감정도 부침개처럼 익는다

밥이 있는 하루

by 선율

비가 며칠째 그치질 않는다. 창밖은 회색으로 덮이고, 도로는 질척이며, 사람들의 옷자락은 늘어지고, 마음마저 눅눅해진다. 예전엔 이런 날이면 으레 생각나던 장면이 있었다. 부추전 굽는 소리, 뜨끈한 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 그리고 막걸리 잔에 차오르는 뽀얀 거품. 그날의 전은 유독 노릇하게 구워졌고, 막걸리는 유난히 시원했다. 식탁에 앉아 한입 베어 문 부추전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청양고추 맛은, 어쩌면 그날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의 매운맛과도 닮아 있었다.


요즘 비는 다르다. 조용히 내려 마음을 적시는 비가 아니라, 모든 걸 삼킬 듯 쏟아붓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침수 소식이 끊이지 않고, SNS엔 한탄과 염려가 가득하다. 이처럼 세상이 흘러넘칠 듯한 물결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과거엔 비가 오면 우울해질 틈도 없이 전을 부치곤 했다. 밀가루에 물을 섞고, 부추와 고추를 송송 썰어 넣으며 손끝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조용해졌다. 전을 뒤집는 순간, 어쩌면 내 감정도 함께 뒤집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입 안에서 바삭함과 매운맛이 어우러지면 묘하게도 마음이 놓인다. 아, 나 아직 감각이 살아 있구나. 내 감정도 어딘가에서 익어가고 있구나.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면, 빗소리와 술기운이 뒤섞여 이 세상이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저 ‘맛있는 한 끼’였을 뿐인데, 돌아보면 그 안에는 내가 나 자신을 조용히 어루만지던 작은 위로의 의식이 있었다.


감정이란 참 묘하다. 어떤 날은 억지로 꾹 눌러야 하고, 어떤 날은 굽듯 익혀야 풀리는 것이다. 빗줄기처럼 감정도 때로는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우리를 휘청이게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전을 부친다. 막걸리를 따른다. 그렇게 우리의 감정은 기름에 지글거리며 조금씩 익는다. 너무 바삭해도 안 되고, 너무 덜 익어도 안 된다. 적당히 익은 감정은 우리를 지탱하게 해 준다. 삶은 어쩌면 그런 감정들을 적당히 익히는 과정 아닐까.

오늘도 비가 온다. 우산을 펼치며 생각한다. 이 비가 감정의 빗장도 함께 열어주기를. 부추전을 뒤집듯, 나의 우울도 한번 뒤집어지기를. 그리고 막걸리 한 잔처럼, 오늘 하루가 내 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기를. 그렇게 우리는 비 오는 날마다 삶을 조금씩, 익히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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