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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Aug 17. 2023

인생에서 폭풍우가 지나간 후

번아웃과 우울증 극복 후, 내 인생에서 달라진 1가지

 삶이 힘겨워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보고 세상은 '고작 눈물밖에'라는 말을 붙이곤 한다. 비릿한 눈물냄새가 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뜻한 이야기가 만연했던 다큐멘터리에는 온통 불안한 경제와 서민들의 설움이 가득한 이야기만이 그려졌고, 뉴스기사는 칼자루를 손에 쥔 흉악범들의 이야기로 난장판을 이루었다. 이런 세상에서 어찌 살아가겠냐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만큼 타인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인색해졌다.

 이런 세상에서 어찌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한숨이 짙게 흘러나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뼈마디를 잇는 관절에서는 녹슨 그네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것이 노동이든, 삶이든. 반복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여 새로운 것을 찾겠다고 나서기엔, 요즘은 너무나 모든 것들이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생에도 어른들은 '젊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너 어릴 적에는..."으로 시작하는 말에는 늘 뼈가 있었다. 특히 20대 때는 어른들의 조언에 대한 극심한 편견이 있었다. 지나온 어른들의 삶을 촌스럽고 무지한 것으로 바라보곤 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참신하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과거의 것들은 부정하기 일쑤였다. 어른들도 모두 20대를 견뎌 내었는데, 나의 20대만 아픈 줄 알았다. 어떤 때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님을 야속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리도 내 속마음을 몰라주실까. 이렇게나 살기가 힘든데, 반듯하게 일어서서 자라나는 것도 버거운 세상인데, 부모님의 잔소리는 세상을 너무나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젊을 때 돈도 많이 모으고 싶고, 경험도 많이 하고 싶은데 그게 둘 다를 이루기에는 물리적으로 역부족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잔소리를 들어가며 회피한 지 언 10년, 그렇게 30대의 초입에 젖어들었다.


이룬 것 없이 열심히만 산 20대. 30대의 초입에서 감정의 밑바닥을 보다

 집안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 보낸 나의 20대는 매우 가난했다. 밑으로 형제가 더 있었기에, 대한민국 장녀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 없었다. 20대, 사회초년생의 월급으로 재테크도 빠듯한 시기에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 용돈을 챙겼고, 그런 와중에도 언론인에 대한 꿈을 꿨다. 그때 부모님은 '돈을 많이 모아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매우 불가능했었다.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마음이 힘들어 홀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끝까지 부모님께는 힘든 내색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끝까지 내가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는 줄 모르셨다. 번아웃과 우울감에 빠져 소리쳐 울기 직전까지.

 어느 명절, 부모님을 찾아뵌 나는 결국 울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부모님께서 나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하던 순간이었다. 저보고 대체 어떻게 하라구요! 나는 방문을 닫고, 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었다. 20살이 되고 10년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된 나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돈도 제대로 모아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언론고시는 합격하지도 못했으며, 좋아하는 출판 일은 코로나 직격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30살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어릴 적부터 상상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일에도 당차게 살아가는, 야무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 앞에 마주한 나는, 그때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 앞에서 처음으로 울음이 터진 날, 아버지는 나에게 큰돈을 건네셨다. 내가 돈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더더욱 비참한 마음이 들어 그 큰 목돈을 받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돈이 부족해서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라가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속도 말도 못 하게 썩어가기 시작했다. 많이 입은 상처에는 어떤 것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그때야 엄마는 내가 그동안 내 돈 주도 제대로 옷도 사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셨다. 구멍 난 양말도 버리지 않고 꿰매 신었고, 값비싼 옷은 꿈도 못꿨다. 그 중 내가 가장 사고 싶었던 물건은 카메라였는데, 시중에는 판매하지 않는 오래된 DSLR 카메라를 사겠다고 근로장학생을 하며 꾸역꾸역 돈을 모아 중고로 구입했다. 그게 당시 내 인생, 가장 큰 소비였었다. 휴가도 제대로 써본 적 없이 오직 일만, 직장을 그만둘 때도 바로 다음 직장을 구해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일을 쉬면 커리어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안정적인 월급 떨어지면 끝장날 것만 같던 삶, 그래도 놓지 못했던 꿈,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숨통을 죄여왔다. 나는 그렇게 과거에 스스로를 가두고 후회와 절망 속에 서서히 말라죽어갔던 것이다.



폭풍우가 지나가니, 나의 바다는 평온해졌다

 영원히 죽을 것만 같았던 나의 영혼이 평온한 안식을 되찾기까지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세상의 파도는 더 악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 가운데서 나 홀로 평온함을 찾은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나도 아직 내 안의 화를 다스리는 정확한 방법을 몰라, 늘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울증의 초기증상 중 하나는 단연, 불면증이었다. 밤마다 부정적이고 안 좋은 생각에 사로잡혀 잠못이루던 나는, 다음날 아침이면 피폐한 얼굴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얼굴은 며칠 제대로 못 먹고, 못 잔 사람처럼 흙빛이었고, 밤새 울어 눈은 퉁퉁 불어 있었다. 울다 잠들고, 다음날 심신이 피로해져 또다시 안 좋은 생각을 반복하다가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내가 잘 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녁 러닝을 시작했고,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혹사시키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차츰 나는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 '난 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들이 온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우울감에서도 벗어나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욕심'을 버린 후부터였다. '난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던 20대 때는, 난 늘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다.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가족들에게 힘든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꿈도 이루고 싶었던,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 그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나자 오롯이 나 자신이 보였다. '난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 자신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없다. '난 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가득찬 일, 지금 당장 이룰 수 없을 이 불가능할 일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준비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에도 할 수 없고, 또 먼 미래에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를 '꿈'과 '목표'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것. 그래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더 꼼꼼하고 계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욕심이 내려가는 순간, 나는 아주 평온한 마음 상태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 엄마의 깊게 파인 주름살이 보였다

 우울증을 극복하고 난 이후, 나 자신이 가장 크게 체감하는 변화가 생겼다. 바로 감정의 폭이 정말 커졌다는 것이다. 정말 작은 것에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남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영화라고 해도, 나는 눈물을 닦으며 극장을 나왔다.

 더 이상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본 나는, 엄마와 대화를 하던 도중 순간 울음이 터져버린 적이 있었다. 그동안은 자세히 보지 않았던 엄마의 깊게 파인 주름살 때문이었다.

 "나 어렸을 때, 우리 엄마 참 고왔는데."

 할머니처럼 주름살이 많아진 엄마의 손을 쓸어내리며, 나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말했다.

 "엄마 참 고생 많이했다" 고.

 20대 때는 그저 내 인생 아까운 것만 바라보다가, 이제는 내 가족들의 인생,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도 감정을 담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부모님의 말이 잔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아닌, 마치 32살이 된 엄마와 이야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 든 친구, 그러자 마음 한 편이 욱신거렸다.

 "엄마는 내 나이 때 어떻게 살았어? (...) 어떻게 그런 속상한 일을 겪고도 참았어? (...)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견뎠어? (...)"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엄마의 인생을 들었다. 마치 32살로 돌아간 그때의 엄마가 나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만약 내가 엄마였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자식인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희생할 수 있었을까?

 "엄마 인생은 너야."

 나는 내 인생이 망가져버린 것 같다고 울고 있었을 때, 엄마는 나를 위해 당신의 인생을 희생했다. 깊게 파인 주름살과 조금 굽은 허리와 온종일 서있느라 혈관이 퉁퉁 부은 다리까지. 나는 엄마 앞에서 울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 냈다.

 스무 살이 되고,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울어본 적 없던 내가, 감정은 숨기고 최대한 힘들지 않은 척 연기했던 내가, 이제는 부모님 앞에서 울고 있었다. 부모님의 말이라면 잔소리 같다고 듣기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나이 든 친구의 말이라며 경청하고 존경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이게 삼십 대의 내가 느낀 가장 큰 변화이자, 감정이었다.

 나는 그동안 엄마를 거짓말로 사랑해 왔다면, 이제는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엄마의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내가 마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라는 걸. 그저 우리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면 되는 세상이라는 걸, 나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다. 닿을 수 없는 먼 미래의 꿈만을 바라본 채, 눈앞의 것들은 놓쳐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말이다.


 나의 인생에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는 이제야 깨끗해진 나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수평선으로 나뉘진 먼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해변가에서 찰랑거리는 바다물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삶. 모두가 아프지 않고 행복한 그런 삶을. 그동안 똘똘 뭉친 욕심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기만 했던 나의 20대 인생은, 30대라는 2막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벼워졌다. 욕심을 내려놓고 나자, 이 거대한 욕심은 내 인생에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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