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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y 15. 2024

바람


 바람에 감겨 드는 차가운 감정이 가슴에 스며든다. 햇살 찬란하던 날의 기대는 구름에 가리워졌고, 거센 돌풍은 물살을 일으켜 파도를 만들었다. 바람이 만들어낸 파도가 제법 거칠어지자 내 마음도 한층 더 복잡해졌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당돌함은, 시간 앞에 조금씩 삭기 시작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은, 사실 어쩌면 그동안 망각해 온 설렘이었을지도 모른다. 덮고 있어서, 억눌려있어서, 그 마음이 그리워서 잠시 사랑을 잊었노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떠올린 것뿐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그 사람과 나만의 특별한 사랑을 보낸 게 아니라,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사랑이었노라고.

 어떤 삶과 어떤 관계가 옳은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더 심하게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그리움은 사계절 내내 내 주위를 맴돌 수도 있다. 그건 더 이상 가볍게 흩어지는 날씨가 아니었다. 습관처럼 당신을 떠올리고, 가슴 앓이 하다, 가끔 꺼내 보이는 추억이라도 크게 몸살을 앓게 될지도 몰랐다.

 왼쪽 손목이 시큰거려 한참을 내려다보다, 나는 지금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여러 형태의 사랑들을 떠올렸다. 기억이 쌓여갈수록 그 사람을 원망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기억을 억지로 묻으려 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은 기억대로 좋았던 추억으로 흘려보내야만 했다. 가끔 그 사람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잊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운 이의 얼굴을 덮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당신을 그리워하는 일이 차츰 지겨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내 기억에서 완벽하게 도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움이 만일 바람이라면, 그럼 이 바람도 언젠가 멎게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사계절을 외로움과 불안 속에 밀어 넣게 되더라도, 잊어야 하는 사람의 얼굴을 완벽히 잊을 수 있게 된다면 힘겨워도 조금 더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을 기대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떤 날은 당신과 재회하는 것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만지고 싶었던 얼굴을 만지고,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뜨겁게 안아주던 날들을. 당신도 나처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만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나.

 아무렴 무슨 소용인가.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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