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소녀에게 깃털 소년은

by 남쪽맑은물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에는 빛이 가득하고 물에서는 풀이 자라고 물줄기가 하늘과 맞닿는다. 그런 습지 구석구석에는 정말 늪이 있다.”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미국)」 시작 부분 독백이다.

어린 시절부터 습지에 살던 소녀 카야. 가정이 해체되면서 습지에 혼자 남게 된 소녀는 세상과 단절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유일한 친구는 케이트. 케이트는 생물학과 깃털을 좋아하는 소년이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습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자에게 세상이 얼마나 냉정하고 편견이 많은지를 이야기한다.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을 차별하고 무시하지만 그녀(소녀는 그녀가 된다)는 외로움과 친구 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다 야생생태학자가 된다. 깃털 소년, 케이트의 관심과 사랑으로 둘은 소통하며 평생을 함께한다. 그러다 카야는 태어난 습지에서 죽는다. 마치 늪으로 사라지듯이.

우리의 삶은 어디엔가 갇혀있는 시간이 있다. 처음에는 일정한 기간과 일정한 생각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강요는 자유를 부른다. 자신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기도 하고 편협한 기준이나 폭 좁은 발걸음에 갇혀 있기도 한다. 과거의 경험이나 편집된 기억에 갇혀 있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최신 유행이나 오래된 관습에 갇혀있기도 한다. 어디엔가 갇혀 있다는 것이 재난이 되기도 한다. 재난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갇혀 있었던 시간 동안,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나 열망,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마음,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의 신선함, 발견되지 않은 희망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것을 감지할 때, 그 시그널은 위대하다. 그 기미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기회가 된다. 그것은 소중한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대화 같은 것.

깃털 소년은 습지 소녀에게 글을 가르쳐준다. 학교 문턱에서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경험한 소녀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글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글에는 습지가 있고, 하늘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새가 있다. 글에는 비와 바람이 있고 사람과 동물이 있다. 글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고 그리움과 외로움이 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습지 소녀와 깃털 소년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사랑에 빠지고, 책을 만지며 기쁨을 나누고, 책을 빌려주며 위로한다는 것을 알게 된 습지 소녀는 작가가 된다.


우포늪에 갔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습지였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식물들과 자연에 대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찾아서. 정작 우리를 반긴 풍경은 새롭게 지어지는 건축물로 인한 공사 중의 소란한 풍경이었다. 분주함과 엉켜있는 분위기를 건너뛰어 조망이 가능한 전시관에 올랐다.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의 습지를, 국내 최대 자연 늪지를 사진으로, 문구로, 망원경으로 만날 수 있었다. 늪의 역사와 생태의 중요함을 그곳에 살고 있는 새들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저절로 습지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들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새가 날기 위해 얼마나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를 알고는, 새를 위해 새가 있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숲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음악을 크게 들어대는 것이 새에 엄청난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이다. 새가 나는 것이 살아있는 이유지만 매 순간 날 수는 없지 않은가. 새에게도 휴식이 필요함을, 모든 생물은 혼자서 혼자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함을.

늪지의 둑을 걷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를 만났다. 평생을 습지에서 살아온 할머니는 갇혀있는 자의 자유를 말했다. 보호한다고 하니 더 사람들이 온다며, 심심하지 않아서 좋기는 하지만, 보호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습지를 보호한다는 마음이 생태환경을 챙겨야 하는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마도 문구로만 이해하는 허위의식에 대한 일침이라 생각했다.

“내가 갈 때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쉬이 갔으면 좋겠다.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늘 충분했다.” 습지 소녀는 습지를 조용히 다녔다. 자기의 발자국을 나뭇잎으로 지우며 다녔다. 자기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는 흔적들. 소녀는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지우려 했던 흔적마저 지나치지 않는 깃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새의 깃털을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를 만나지 못해도 괜찮았다. 깃털만 남겨두고 와도 그들은 알았으니까. 깃털만 보아도 새의 이름을 아는 소녀와 소녀의 모든 흔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소년은 오래오래 함께 살았다. 갇혀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날아갈 날개를 쉬게 하는 일이다. 한번 날기 위해 내적인 시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깃털 소년은 알고 있었다.

“파도가 가면 오듯이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죽음이 비극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죄는 더더욱 아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먹잇감이 포식자를 죽이는 일. 먹잇감은 처음부터 먹잇감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포식자로 태어난 생명은 없다. 생명체는 먹잇감이자 포식자다. 변경이 가능하다. 자웅동체다. 방어와 공격의 속성. 방어에 실패하면 먹잇감이 되고 공격에 실패해도 먹잇감이 된다. 방어에 성공하고 공격에 성공해야 한다. 두 가지가 가능한 것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는 모두 먹잇감이다. 그러니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먹잇감이었으나 포식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생명은 습지가 된다. 습지의 삶은 밑으로 빠지지만, 그곳에서 다른 생물과 공유한다. 보글보글 숨을 쉬며 기운을 마련한다. 물이 들고 나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뿜는다. 그러다 새의 날개를 타고 하늘을 난다.

“이제 나는 습지가 되었다. 나는 백로의 깃털이며 물가에서 씻겨나가는 조개껍데기이자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라 습지 깊은 곳에서 반짝일 때 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저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습지에서 태어나 습지에서 죽은 습지 소녀. 깃털 소년이 전해준 깃털을 타고 하늘을 날아 놀라 우주의 숨결이 된 소녀는 하늘 저편, 어디에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자연을 묘사한다. 그러다 반딧불 되어 습지로 돌아와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