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More

by 남쪽맑은물

어느 팟캐스트 방송에서 이외수 작가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말했다. 마치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협박처럼 들린다면서 진행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 대화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무엇을 믿는 행위를 이분법으로 설득하는 일이 그리 합리적이지 않을뿐더러, 강한 어휘는 오해 소지가 있다는 의미였지 싶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협박처럼 들린다는 슬로건에 대한 작가 의견이 엉뚱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과 종교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종교가 없지만 그렇다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대하여 무관하게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자기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 힘이 힘 따위가 되거나 알량한 힘밖에 되지 않아서 겪은 일이 불안과 두려움이 되어 무력감에 시달린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허무함으로 안절부절못하거나 허탈함으로 헤매는 일이 숱하니까. 그럼에도 맹목적으로 솟아나는 새싹처럼, 목적 없이 만나게 되는 삶을 이끄는 신념이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한다. 부르르 떨면서 삶을 감싸는 어떤 기운이 신념이 되어 그 기운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의미를 나열하게 된다.

그러다가 지금까지의 삶이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마치 한밤중에 미물보다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그렇다. 지난밤에 꾸었던 꿈이 생생할 때, 그것이 길몽이든 악몽이든 흉몽이든 염몽이든 그 꿈을 기억하려면, 부적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최소한의 그 신호를 느낄만한 무언의 교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냐며 신음할 때가 있다. 특히 먹통 같은 밤에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집요한 욕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욱더 그렇다. 욕망의 머리채를 흔들며 달려드는 메마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 적의와 환대를 구분할 수 없고 그곳에 숨은 뜻을 잘 알 수 없을 때, 종교를 생각한다.

신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멜 깁슨이 연출한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 2016)」에서 인상 깊은 인물, 기독교 신자인 주인공 도스를 떠올린다. 주인공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며 군인이 된다. 살인과 무관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그 계명을 지킨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지만, 지극히 현실감을 녹여낸 이야기다. 살인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비현실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현실에서, 과연 그에게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현실이라면, 종교의 계명은 비현실이다. 진부하고 당혹스러운 아이러니에서 인간의 신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신념이란 무엇을 굳게 믿는 마음이니, 그 무엇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다.

주인공의 신앙심에는 어린 시절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쟁 후유증으로 충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이 주인공에게 정신적, 심리적 영향을 주게 된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장난치다가 형을 죽일 뻔했던 일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되어 비폭력주의자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보호를 중요시하면서 주인공은 어떠한 폭력이 용납될 수 없음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총을 소지하지 않아도(이 문제로 폭력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비폭력적으로 대응한다) 의무병으로 참전하여 군인 의무를 다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부상자를 외면하지 않는 주인공의 행동에서 종교적 신념과 마주하게 되는데,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과 신을 믿는 힘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한다.

“One More, One More, One More……”


도스에게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천국에 가고 싶거나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적어도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에 대한 성찰과 마주한다. 구불구불한 길, 굴곡이 깊은 길, 끝이 희미한 길을 가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인간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것이 신이 준 계명이기에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신을 믿는 자로서 신성한 행위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도스에게 종교는 신에 대한 예의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만물에 예의를 다하는 마음이고 행동이라는 생각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다운 삶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내세관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종교를 존재하게 하는 신념이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심해지다 보니,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두 손을 부끄럽게 한다. 윤기 없이 부패하고 변질하는 종교가 인간이 지닌 불안함을 파고들어 삶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예감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등등 모래시계에 있는 모래알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처럼 삶이 무료해져 무감각해질 때가 있다.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는 것처럼, 적어도 무언가를 경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에 종교의 힘을 사용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종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차이조차도 신과 인간의 끊임없는 대화로 선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인간답다는 것은 신을 닮아가는 것이기에 신을 닮는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이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답지 않을 때 신도 인간에게 실망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실망한 신은 세상을 다시 어둠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둠은 걷히지 않았습니다.”라는 동화의 엔딩처럼 말이다.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야 할까. 사실 우리는 불신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힘이 있다는 사람들을 불신의 횃불이라고 말하는 사회적 증오심을 지나친 표현이라고 항변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불신은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으니, 힘이 있고 없음이 세상에 두루 퍼져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싶은 마음이란 신을 믿든지, 안 믿든지, 종교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중요하게 믿고 따르는 생활철학에 대하여 사유하는 일일 것이다.

영화 주인공 도스처럼 무언가를 시도해 볼만한 일을 한 번 더 실행하는 것이 신념이 아닐까. 버리지 말고 간직해야 할 정신을 하나 더, 함께 할 소중한 사람을 한 명 더, 소통하기 위해 듣는 것을 한 번 더, 해가 지기 전에 노을 보기를 한 번 더, 그리운 얼굴 떠올리기를 한 번 더, 한 번 더…. 거품을 내어 삶을 더욱 깨끗하게 하는 신비한 체험이 종교가 아닐까. 욕심이 불신의 씨앗이 되거나 불평등의 신호일 때는 ‘One More’의 작동이 멈추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신의 마음이 아닐까.

타인에게 종교적 신념을 주입하기 위해 종교적 문구를 힘껏 외치는 대신, 신과 인간의 의미를 더 구체화할 신념으로 ‘One More’를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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