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십계명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공격성을 제어하려는 최초의 시도’라는 글을 썼다. 십계명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며 지켜주어야 할 예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니 고압적이고 경직된 명령이라는 개인적인 느낌이 조금 누그러진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강요당한 어린이에게 나타나는 공포심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한 마음이랄까.
십계명을 명령한 신과 열 가지 계명을 수행하려는 인간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자식을 사랑으로 훈육하는 과정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인간은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법칙, 도덕이나 윤리 사이에서 고민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사랑인지, 집착인지, 폭력인지를 뉴스나 영화, 문학이나 다큐를 통해 질문한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신은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은 신이 보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좋다는 기준이 신의 영역이라면, 신의 명령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 중에 신과 밀접한 능력이 있는 자를 특별하게 인식한다. 그러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자도 인간이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돌판 두 개에 새겨 모세에게 전한 계명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인간의 공격성을 차단하는 명령에는 적극 동의한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이나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의 덕목이니까. 일종의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조심해야 할 양심이랄까.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야 하는 원칙 같은 것.
그렇다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인간은 놀이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퍼즐 맞추듯이 자기에게 이로운 의미를 만든다. 신도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열 개나 되는 계명을 주며 고민하게 한다. 과연 몇 개나 지킬 수 있을지를 서로 내기라도 하듯, 좋은 사람이 되는 요건을 맞추기 위한 퍼즐게임과 비슷한 계명 지키기. 그러니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신을 외면하거나 신이 인간을 외면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다. 서로 외면한다면, 신과 인간은 너무 외로울 것이다. 외로운 인간을 위로하는 신이란, 외로움이 무엇인지 공감하는 신만이 가능하니까.
인간의 저속하고 삐뚜름한 속물근성조차도 너그럽게 품어주는 신의 존재는, 상스러운 표정으로 퍼붓는 인간의 비웃음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세련된 태도로 받아들이니까. 그것은 외로움이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니까. 의무로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간이 가진 속성은 신이 지닌 속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신의 이론이 편견일 수 있음을 경직된 인간을 보면서 알게 되니까.
그러니 신과 인간은 한편일 수밖에 없다. 비록 냉소적인 시선일지라도 끄떡하지 않으며 냉소쯤은 개인이 터득한 다양한 의미를 말살하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던 신의 음성을 잘못 해석했는지, 오히려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는 장치로 전락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의심하다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는 사회현상에서 무서움을 느낀다. 과연 어떤 논리에서 시작된 것인지.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은 수녀원에서 아들을 강제 입양 보내야만 했던 미혼모 필로미나의 이야기다. 필로미나는 아들과 생이별한 후 50년 동안 간직한 비밀을 추적하면서 놀라운 상황이 펼쳐진다. 비밀은 수녀원의 추악한 진실이 밝혀지는데 실마리가 된다.
혼전 임신한 어린 여자, 부모에 의해 강제로 수녀원 보내지고 임신과 출산을 죄악으로 보는 수녀원의 그릇된 종교관을 보여준다. 섹스는 더러운 죄인 것이다. 그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마취도 없이 고통스럽게 아이를 출산한 어린 미혼모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종교는 속죄를 미끼로 인권을 유린한다. 부모의 허락 없이 돈을 받고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수녀원의 극악한 진실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학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허구 같아 깊은 아이러니에 빠지게 한다. 마치 신과 인간의 아이러니를 은유하는 것 같아서 영화가 끝난 후, 한동안 길바닥에 누워 있는 삶의 진실을 생각하게 한다.
절대적인 큰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등 뒤에서 자기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든든하다. 무사한 일상에 주석을 단다든지, 낙오했거나 사고를 쳤더라도 다행히 그 과정을 헤쳐 나왔을 때 고백 같은 것을 중얼거린다든지 등등, 신의 존재가 이런 거구나라며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한 느낌이 들거나, 잘못한 것이 있는데 잘못한 것을 모르는 것은 감정통제 오류일 것이다. 오류로 인한 감정 소통이 어려우면 불행하다. 인류를 위협하는 신의 계시 때문에 겁먹은 적이 있는 인간은 감정뿐만 아니라, 의식통제 오류로 자신과의 소통도 어려울 때가 있다. 신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당한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신의 계시는 인간을 위협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능력은 정당한 의식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희망이나 꿈이 오래되면 악몽이 된다고 했던가. 인간의 삶을 꿈으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인간은 노력한다. 만약에 신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하더라도, 비록 현대의 도덕적 사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도덕적인 것과 상관없는 것처럼,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내용을 생각하니, 지켜야 할 규칙이나 명령이 공격성으로 변할 논리나 의식이 아닌지, 검증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이 신의 계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공격성으로 변질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서 생긴 명령이 왜?라는 질문이 될 때, 이미 시작되었으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상황에서는 붙들고 있는 논리나 의식을 멈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인간의 열망 중 하나가 신과 오래 머물고 싶은 것이니까. 신들이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질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