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같아요.
- 새요?
- 네. 마치 무리 지어 앉아 있는 새, 날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새요.
- 아, 문자가 새처럼 보인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거 같네요.
호수 근처 문화전시관에서 열린 서예 전시회. 산책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공간에서 회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나눈 말이다. 관람객이 보이지 않아 살금살금 전시장에 들어가서 마주친 광경. 문자가 집단으로 고물고물 모여있는 새처럼 보여서 아, 하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인기척 없는 강가를 혼자 걷다가 갑자기 만나게 되는 생명들, 너무 한적해서 마치 고요만을 허락하는 곳에서 만난 새처럼, 문자가 마치 추상화처럼 보였다. 여러 글씨체를 아우르는 한글과 한자로 벽을 가득 메운 풍경, 특히 한자는 쉽게 읽히지 않아 더욱 그림처럼 보였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가 그림책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각양각색 먹빛 문자들이 얼마나 다정한지, 너무 다정해서 마음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던지…. 하마터면 내 마음의 묽고 진한 그림자를 고백할 뻔했다.
붓글씨의 격식이나 양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세히 보니 모든 문자가 새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주의 비밀을 품고 있는 만물처럼 이 세상 만물이 문자에 스며들어 있는지, 내 눈에는 여러 형상과 겹쳐 보였다. 몸을 핥고 있는 고양이와 주인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강아지를 상상하게 하는 문자가 있는가, 하면 마치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문자와 절벽에 핀 꽃처럼 외롭지만, 고고한 문자도 있었다. 바투 바투 모여있는 새들 모습으로 보였던 문자가 집착과 애정 그 어디쯤 여러 가지가 섞여 엉클어진 감정처럼 당최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보였다.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Every Day a Good Day」(일본, 2019)은 다도에 관한 영화지만, 일상에 스며든 이야기를 다도로 잔잔하게 펼쳐놓는다. 찻물 우리듯, 삶을 우리는 것이 매일 반복하고 반복되는 일이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잔잔한 영상으로 감동을 준다. 등장인물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스무 살 노리코가 서른 살을 넘기면서 겪는 일들, 삶을 구성하는 일들이 계절이 달라지는 것처럼 변화하는 개인 삶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학교, 취업, 연애, 취향, 미래 그리고 가족, 죽음 등등, 누구나 겪지만 딱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변으로 뒤죽박죽 하는 우리들 이야기다. 일상이 압도당하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대상 모를 두려움이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다도를 익히는 과정에서 하나, 둘 행렬을 이룬다.
다케다 다도 교실에서 다도를 배우는 노리코는 세상을 느리게 바라보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다도에 몸을 익히는 동안 차 한잔이 주는 여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각하면서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노리코는 안도한다. 찻잔을 만지고 도구를 사용하는 예절이 악장과 악장을 연결해 주는 침묵과 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오래된 감정이 신음처럼 살아났다 사라지듯이, 마치 뭉근한 소리가 나는 더운물과 경쾌한 소리가 나는 찬물 사이를 연결하는 것들이 일상임을 공감한다. 계절과 계절을 이어주는 것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임을 알게 된다.
차를 만들고 마시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차를 마시는 공간에서 빠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 문자 추상이다. 족자에 새겨진 ‘폭포(瀑布)’의 마지막 획에서 물이 낙하하는 폭포를 형상화한다. 절벽을 무서워하는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폭포를 바라보니 의기소침한 삶의 여정이 조금 편안해진다. “매화향이 온 천지에 퍼진다.”, “대나무잎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청풍이 가을을 부른다.”는 문구는 계절과 무관할 수 없는 정서다. 문자는 기호다. 언어를 시각화한 것이 기호이고 모양이니 도형이 되고 문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자가 추상화로 보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마음에 숨을 쉬고 있는 시각이 예술이 아니면 무엇일까.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문자가 그림으로 보이는 것은 상상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밀도 있는 상상력 있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다가 또 다른 신비함으로 전이된다. 가끔 얽히기 좋아하는 속성과 조합을 이루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함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눈에 찍힌 형상을 자기 마음으로 해석한 상상력으로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중, 문자가 빠질 수 없다.
문자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 결정체처럼 보이다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처럼 보인다. 빗방울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비처럼 보이기도. 좀처럼 녹지 않을 눈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나뭇잎처럼, 좀처럼 지지 않을 꽃처럼, 문자가 세상 만물을 품는 화양연화처럼 보인다.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추상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영역일지 모른다. 이처럼, 문자는 상상력과 추상력이 착종(錯綜)한 결정체다.
이것저것 섞여서 엉클어진 삶일지라도 이리저리 섞여 있는 삶이 없으면 매일은 불가능하다. 대답할 말이 궁색할 때, 적당한 말을 고를 때, 낡아도 여전히 좋은 말을 더듬으려 할 때, 구차한 생각 주머니가 열리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할 말을 생각하는 시간이 부자연스럽게 흘러도 그 시간을 일상에 맡기면 그리 쓸쓸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하고 순한 바람이 독한 바람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극점을 돌아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매일이 날아가는 것이 운명이 아닐까.
묵연히, 꾹꾹 눌러두었던 비참한 마음이 삽시간에 우울로 물들어 버리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한 자극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도리질하며 저항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벽만 보고 있는 어지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순간에 들리는 종소리가 회의적으로 들리지 않은가. 그럼에도 희미하게 들리는 종소리에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마음이 거룩해지고 않은가. 자기를 에워싼 관념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이 짓궂게도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이나 찔끔찔끔 흘리는 눈물로 변하지 않은가.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미 목표는 시작되고 있으며 거룩한 종소리는 사라지고 어지러운 마음은 이미 벽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우둔하게 관념 바닥에 숨어있던 심각함이 영롱하게 눈앞에 빛을 내면서 가벼워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당장 일어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눈에 보이면 그 일을 하면 된다. 다른 이의 말이나 판단으로 휘청거릴 이유는 없으니까. 만일 휘청거린다면, 체면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면 되니까.
달큼한 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스르르 망설이던 어제의 어둠과 절망은 언제 사라졌나.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날들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나. 찌그러진 바람이 언제 지나갔나. 세상에 속지 않기 위해 더욱 강퍅해지는 우울함이 언제 사탕처럼 녹아버렸나. 소멸하는 것을 뜬 눈으로 보면서 귀중하게 여기는 일상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언제는 매일이다. 누구에겐 타락한 오늘일지라도, 누구에겐 죽음을 암시하는 오늘일지라도, 누구에겐 음모가 유령처럼 달라붙는 오늘일지라도, 누구에겐 진지함과 경박함이 뒤엉켜 어지러운 오늘일지라도, 누구에겐 표독한 얼굴이 떠오르는 오늘일지라도, 누구에겐 무수한 문자로 상상하고 추상하는 오늘이고 희한한 매일이다.
- 이 문자도 새처럼 보이나요?
- 음, 글쎄요. 찬찬히 보니까, 폭포 같은데요? 어! 아니다, 지금은 물방울처럼 보여요.
- 물방울이라….
- 네, 순간과 함께 떨어지는 물방울이요. 여러 가지가 섞여 규정할 수 없는 매일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