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내가 된다

by 남쪽맑은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의 이야기를 조용한 시선으로 섬세하게 영화에 담는다. 가족 관계에 대한 파격적인 상황, 예를 들면, 아이를 버리는 부모, 그 부모를 찾거나 기다리는 아이 그러다 결국에 버려진 아이들의 삶 등을 잔잔하게 표현하지만, 마치 안개가 걷히려면 시간이 걸리듯이, 분질러진 마음이 오랫동안 침묵을 동원한다. 가족이 가장 잔인한 가해자라는 침묵이 멍한 어지러움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뭔가 부족한 감정이다. 마치 탐스러운 과육을 벗겨 알뜰하게 먹는 사람 모습에서 보이는 탐욕 같은 것이랄까. 여린 싹이 트는 봄날 아지랑이 틈새로 보이는 햇빛에 무의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어둠 같을 것이랄까.

가족이란 인간관계 형성의 기본이지만 그 기본이 무너진 가족의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무질서한 관계에서, 가족에 대해 더욱 섬세하게 질문하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에서 감독이 세밀하게 읊조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분명해 보이는 논리가 어떤 이유로 형체를 잃어버리는지, 당연한 논리가 부패한 사회현상을 앞세우고 얼마나 처참한 몰골을 한 뒤엉킨 논리가 되는지를. 때로는 남의 일 같은 이야기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산채로 달려드는 지를.

-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하는 거죠.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피를 나눈 아버지만이 진정한 아버지일까, 피를 나눈 가족만 가족일까를 질문한다. 세상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듯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관계도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하지 않아서 획득할 기회를 잃은 관계도 있는 것.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 무언가 획득해 나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느낌이 들며 그 획득의 방식이나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게 아니구나를 실감한다”(『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바다출판사)라고 감독은 글로 표현했다. 관계에 대해 깊은 성찰을 이끄는 문장이다. 그것은 피가 섞여있다고 조건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며 조건이 있음에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조건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럼에도 혈연과 상관없이 가능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영화에 풀어놓는다. 우리는 누구의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이기에 가능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있다. 혈연이 아니면서 가족관계를 형성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복합적인 관계 지도를 생각한다. 결국, 가족이라는 관계의 유지는 혈연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아마, 그것은 용기이며 용기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수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모든 관계는 나로부터 타인을 향한 마음의 움직임이고 그 움직임은 관계의 시작이니, 누구의 무엇이 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우선임을 영화 장면과 장면 사이 침묵으로도 말한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관계 형성을 위한 힘을 비축한 곳이 어디인지를 헤아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분명히 어디엔가 그런 힘이 있을 테니까.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육 년 동안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출산했던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말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빠진다. 1960년대에나 일어났던 일이, 그래서 아이 이름을 발바닥에 쓰던 일이, 2000년대 일어난 것. 초등학교 입학 혈액검사 과정에서 아이와 부모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 가족의 아이가 진짜 내 아이(류세리)라는 사실이 충격이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피아노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엄마. 좋은 직장에 다니는 아빠와 육아에 전념하는 전업주부 그리고 귀공자 같은 아들(케이타) 모습은 매우 이상적인 가족 풍경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6년 동안 내 가족으로 살아온 아이(케이타)가 생면부지의 남이었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존재했던 울울창창한 이야기는 엉망이 된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혈육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문제가 마치 모국어를 잃어버리듯이, 참말이나 참행동에 대한 혼돈으로 현실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정말 아이를 바꿀 것인가.

출생의 비밀을 숨겨서 악성을 드러내 악마짓을 흉내 내고 아귀다툼하는, 무자비하고 탐욕적인 영화를 상상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 두 가족은 협력한다. 두 가족이 함께 만나기도 하고 낯설지만 생물학적 부모 집에서 토요일밤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두 가족의 심리 변화를 따라간다. 그러나 절망적인 언어나 신파풍의 슬픔은 별로 없다. 이 새로운 사실이 지금까지의 관계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배우들의 밋밋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 즉, 아이를 교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오소소 소름으로 돋는 일인지를 깨닫게 한다.

서로 다른 가정 형편과 교육관이 제 핏줄을 찾아간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영화는 돈으로 아이를 사려는 아버지와 시간처럼 아이를 기다리려는 두 아버지의 차이가 점점 좁혀지면서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타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결국 세상은 이기고 지는 싸움터가 아니며 서로에게 서로가 되어주는 곳이라는 진실 앞에서 아버지는 새롭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자본 논리로 보면 무용하게 보이는 것이 지천인 세상이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우리는 매일 사랑한다. 그 사랑이 누구의 무엇이 된다. 쓸모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이 쓸모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쓸모에 의해 존재하는 것도 어떤 순간은 무용하지 않은가. 그렇게 무용한 시간은 매우 순수한 시간이리라. 6년을 함께 보낸 시간을 실용 가치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인 것처럼 이리 생각해도 내 아들이고 저리 생각해도 내 아들인 것을.

삶에서 모호한 현상들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어쩌면 매일 반복적으로, 아니면 비슷하게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호한 일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면, 존재를 위해 순수하게 경험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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