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선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림을 마주할 때가 있다. 마음에 새겨진 순간이 생생하게 눈앞에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착시나 시력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기한 시선을 거둘 수 없어 그림을 뚫어져라 보면서, 어느 날 미동 없는 나뭇잎을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경험이 시간 너머로 달려오는 현상 같은 것. 그런 현상을 영화 「파울라」에서 만났다.
19세기 독일 화가 프리츠 마켄젠은 오토 모더손(파울라의 남편이 된다) 등 여러 동료들을 모아 예술인 공동체를 만든다. 그들은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파울라도 이 공동체에서 미술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파울라는 그 시대의 화풍인 정확성과 정밀성에 지루함을 갖게 되면서 자기 시각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몰입한다. 그러다 보니 화풍을 따르지 않고 고집만 피우는 ‘제 멋대로 하는 부잣집 딸내미’라는 모욕을 듣곤 한다.
그러다 재능이 없다는 최악의 비난도 받게 되는 파울라 작품에 관심을 갖는 오토 모더손. 둘은 결혼한다. 그 이후, 남편 오토 모더손의 그림은 잘 팔리지만 아내 파울라의 그림은 클라이언트로부터 어린아이 장난 같다는 핀잔만 듣게 된다. 파울라는 험난한 파도처럼 부서지는 자기 정체성이 가득한 예술성을 고민하면서 자디잘게 부서진 정체성을 어떻게 부여잡았을까. 파도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물리칠 수 없는 오랜 경험에서 생기는 상투적인 체념이나 두려움임을 은유한다. 그러나 파울라는 파도에 부딪치고 부서지면서도 오랜 경험을 전복하거나 탈피하지 못하는 두려움에 당당히 마주한다.
파울라는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난한 두 아이의 엄마에게 모델이 되기를 부탁한다. 돈이 필요한 시골 아낙은 기꺼이 모델이 된다. 파울라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젖가슴을 내놓고 아이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과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의 평화로운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린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아이가 젖을 빨고 있는 입술의 움직임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림은 꼭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젖을 빨고 있는 그림으로 다가오는 역동성은 잔잔한 시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까. 마치 배경 음악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영상처럼, 꺾을 수 없는 모성애를 표현하는데 투박한 시골 아낙은 더할 것도 없이 아름답다.
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데 임신한 여성의 몸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세계적인 사진의 거장 애니 레보비츠(Annie Leibovits)는 할리우드스타 데미무어의 임신한 모습을 사진에 담은 적이 있다. 이후 나탈리 포트만도 임신한 모습을 미국의 연예정보 월간지인 《베니티 페어》에 다른 배우들과 나란히 표지를 장식했다. 이 역시 애니 레보비츠가 촬영했다. 테니스 여제인 세리나 윌리엄스도 자신의 SNS를 통해 임신 20주기를 공개했다. 이들의 사진에서 여성과 모성을 넘어 사람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사람이 사랑을 낳고, 사람이 삶을 낳는….
파울라는 소박한 모정만을 화폭에 담기 위해 오히려 감정을 배제하려 애썼다. 여성의 아름다움보다는 생명의 고귀함을 품고 있는 사람 모습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여성이기에 가능한 임신이므로 임신이 가능하지 않은 남성을 비하하거나 비웃지 않았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임신도 하지 않은 자신을 상상만으로 임신누두자화상을 화폭에 담고는 거의 탈진한 상태가 되고 말았던 파울라. 누군가를 잉태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성스러운 것. 결국 파울라도 딸아이를 출산하고 3주 만에 세상을 떠난 것처럼.
필요 이상으로 적대감을 가졌던 그 시대의 남성들이 겁쟁이로 보인건, 아마도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생산이 가능한 여성의 힘을 남성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고귀한 생명을 출산한 여성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결국 아내의 그림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감동을 애써 감추어왔던 남편도 어떤 두려움에 자신의 진실을 은폐했던 것처럼, 은폐했던 진실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아내의, 여성의, 사람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던 오래된 경험으로 변형한 감정은 두려움이었고 겁먹은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화가 파울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오래된 경험은 결코 두려움이 아닌 존재감이었다는 생각에 입 속에 갇힌 말을 조합한다. 은폐하려는 의도가 없는 한, 오히려 자기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려는 자존감은 두려움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까.
대중에게 소개되지 못했을 파울라의 예술작품은 그녀의 꾸준한 글쓰기와 일기, 지인들과 나눈 방대한 대화 기록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점과 선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조합을 이루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자기 생각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기록하는 일이란 오래된 경험에서 변형하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경험은 퍼덕거리는 우리 삶을 튼튼하게 해준다. 그러나 얄따란 경험만으로는 새로운 시선을 알아차리기에는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이 눈앞에 다가올 때, 어떤 무력감으로 뭉그러진 육체와 정신이 흔들릴 수 있다. 마치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했던 신념이 곤두박질치는 마음처럼. 그러나 쩡쩡하게 얼었던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되듯이, 사나운 두려움이 물러나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예술이 종종 비틀거리는 삶을 잘 흘러가게 할 것이다.
어느 날, 더 이상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아 보일 때는 오래 시간 동안 삶 속에 숨어 있는 경험 곁에 머물던 미지근한 의식이 사라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듣거나 보던 것이 아닌, 어떤 바람을 기다리는 중이거나 어떤 새를 기다리는 시간일지도, 입김을 불어도 미동하지 않는 나뭇잎이 침묵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