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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Jan 04. 2023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임신하면 다양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것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워낙 머리숱이 없는 데다가 머리카락이 잘 빠지기도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정도가 심했다. 앞머리 중에서도 눈썹 끝부분쯤, 양쪽 머리가 빠졌다. 마치 데칼코마니 작품처럼 대칭을 이루면서.

  빠지면 얼마나 빠질까, 적당히 무시하려 했다. 그렇지만 무시할 수 없는 속도와 양이었다. 배가 불러오고 손발이 붓는 것이 힘들었지만 감사한 일이었다. 입덧이 지난 후, 식욕이 생기고 잠이 오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태아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니까. 다리에 정맥이 튀어나오는 일에도, 엉클어진 실핏줄이 보라색으로 보일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멈추지 않고 빠지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양을 주고 남는 것이 없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해도 말이다.

 출산 후,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밤송이처럼 삐쭉삐쭉  보이기 시작하더니 앞머리가 파마할 정도로 자라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걱정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고 아이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성경 속 인물, 삼손이 있다. 삼손이 블레셋 족속과 싸우는 장면에서 신의 계시처럼 삼손은 자기의 막강한 힘을 게 된다. 결박당한 밧줄을 끊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을 당나귀 턱뼈로 가볍게 해치우는 모습은 가히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 만화 같은 이야기가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성경의 인물이다.  

  삼손은 특별한 자로 태어났다. 특별하기에 지켜야 하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는 어머니 태몽에 제시된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셨으며 부정한 것을 먹거나 만졌다. 그리고 머리카락의 비밀을 발설하고 말았다. 육중한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삼손은 드릴라의 유혹을 넘기기는 어려웠다. 은밀하고 질탕한 유혹을.   

  그 대가로 머리가 깎인 것뿐만 아니라 앞을 보지도 못하고 힘도 잃어버려 조롱당하는 삼손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그가 기둥을 잡고 어마어마한 신전을 무너트리는 역전 드라마를 완성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블레셋 군주를 포함해 삼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깔려 죽었으니. 도대체 잃어버렸던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 그러나 머리카락이 깎이고 난 후에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사 16:22)


  앞머리를 잘랐다. 언제부턴가 머리카락이 빠져 앞머리숱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서다. 옆으로 넘길 앞머리 양이 줄어들다 보니 제대로 폼이 나질 않는다. 임신한 것도 아닌데 임신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이 또 일어났다. 빈곤한 앞머리를 멋스럽게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앞머리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 보아도 그저 그런 모습. 궁리 끝에 머리띠를 해 볼까 하며 앞머리를 올리니 에구머니,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가지런 잔디처럼, 짧은 머리카락이 어떤 열정과 희망으로 보였다면 환상이었을까.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주 새롭게. 내 마음이 무엇을 품고 있기에, 무엇을 잉태하고 있기에, 잔털이 자라고 있는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바로 그곳에서 나에게 필요한 그 어떤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인가.      

  젊었을 때는 젊어서 몰랐던 것들, 나이 들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사랑할 때는 몰랐던 것들, 헤어지고 나서야 생각나는 것들이 있듯이. 살아서 모르는 것들은 언제 알게 될까. 죽어야만 살아나는 역설적인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는지, 일어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일은 무엇일지 점점 궁금해진다.

  뽑히고 깎이고 끊어져도 이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삶의 근원을 생각한다. 내가 이루어가는 모든 것들은 내 안에서 잉태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것을. 한없이 망망한 세상에서 자리를 내 주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는 그 무엇들이 모여 빠지직거리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을. 어떤 종류의 잉태라 해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가슴에 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특한 정욕으로 허물어진 삼손의 힘도 다시 자란 머리카락으로 정의를 실현했던 것처럼, 실존하는 열정은 쉬지 않고 자유 의지를 뿜어낸다는 것을.


  세상 모든 일은 어쩌면 정의와 정욕, 생성과 소멸, 너와 나의 조율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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