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 필요한 도구 중 칼은 매우 중요하다. 칼이 없으면 요리하는 것이 어렵다. 또한 칼은 사람을 해치는 무기다. 무기로 만든 칼로 요리하지는 않지만(아닐 수도 있다) 요리하는 칼은 무기가 되곤 한다. 물론 많은 사물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처음부터 도구로 만들어진 칼과 무기로 만들어진 칼의 운명이 다르다. 그럼에도 도구가 무기가 되고 무기가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는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뭉개는 것. 운명을 비웃는 악이랄까. 이처럼, 삶은 논픽션과 픽션을 넘나 든다.
무기로써 칼은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논픽션이다. 그러나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써 칼은 어떤 음식을 만들지 모르기 때문에 픽션이다.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작가의 『칼과 혀』(다산북스, 2017)를 읽으면 음식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진다. 칼을 쓰지 않고(?) 칼을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음식을 만든다. 무기인 칼이 아니라 도구인 칼을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설정이 픽션과 논픽션을 믹서기에 넣고 야멸차게 갈아버리는 형국이다. 칼을 사용해 만든 음식으로, 맛을 느끼는 혀의 쾌감으로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 이쯤이면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권정현 작가는 중국 요리사 첸과 일본 사령관 모리 그리고 한국 위안부 길순의 한중일 역사를 재료 삼아 음식 이야기를 한다. 매일 요리하면서 첸은 모리를 죽일 생각만 한다. 복수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복수의 칼질로 묵묵히 요리한다. 요리는 예술이다라는 말을 요리는 살인이다라는 명분으로 보기 좋게 난도질한다. 맛을 느끼는 혀가 맛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모든 경계로부터 해방하는 순간. 칼로 몸을 해하지 않아도 독이 몸에 퍼지는 그 순간부터 죽음에 가까워진다. 첸은 모리를 맛에 취한 가장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독을 탄 맛있는 음식으로 길들이기 위해 요리한다.
생명과 매우 친밀한 음식은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포악한 성격도 순하게 만들지만, 맛있는 음식에 독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신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 혀는 매우 약함을 가장한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곳이기에 막상 어떤 칼과 비슷한 독이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만큼 혀는 제멋대로 약하다.
일본 NEZU 미술관에서 “Cutting a Valiant Figure : Weapons and Armor in the Nezu Museum Collection(늠름한 자태을 드러내다: 네즈 미술관 소장의 무기와 갑옷)”전시를 보았다. 일본의 전통 무기인 갑옷과 무기 전시인데, 그중 압도적인 전시품이 칼이다. 칼을 허리에 찬 사무라이를 표현한 포스터는 가슴 위나 허리 아래 부분은 생략하고 오로지 칼과 칼을 잡고 있는 손과 허리끈을 바뚜 맨 옷의 질감만을 강조해 당당하고 늠름한 무사 이미지를 돋보인다. 칼은 단순히 전투 무기가 아닌 신분과 권위의 상징으로서 용감한 모습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칼을 전시한 방에는 칼과 무관할 수 없는 모든 사물이 있다. 장식품처럼 보이는 일본도가 얼마나 다양한지. 많은 종류의 칼마다 장인 손끝을 거친 칼이 품고 있는 정밀한 감각에 놀랐다. 또한 칼을 구성하는 부품의 명칭과 부품의 정교함이 뿜어내는 직선이나 곡선 그리고 색감에 에 눈이 동그래졌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전시품을 들여다보니 칼을 구성하는 부속품 중 아주 작은 부품도 어찌나 세밀하고 정갈하던지. 그러나 매우 크고 날카롭고 미끈한 칼에서 풍기는 피 냄새를 어쩌지 못하는 후각과 조명에 빛을 내는 칼 어딘가에 사라질 수 없는 피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시각은 설득이 가능하지 않은 여러 이미지를 만들었다.
칼은 일본의 정신적 가치 중 사무라이 문화를 전투와 예술이 결합한 특별한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사물인 듯했다. 마치 세상에서 선과 정의의 승리를 희구하기보다 탐욕과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는 억지랄까.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칼이 예술을 흡수할 수 있는지. 그러나 전시는 일본이 추구하는 정체성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으며 칼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예술성이라는 자부심이 탐욕과 이어져 보였다.
한중일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어떤 동질성에서, 예를 들면, 불상이나 회화, 조각이나 자수 등 비슷한 감성에서 다른 정체성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칼은 좀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방대하게 칼을 전시한 공간을 본 적이 없다. 개인의 경험 부족일 수 있지만, 무기로 사용한 칼이 어떻게 예술이 될까. 전쟁의 언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칼이 말이다. 한중일의 정체성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지점을 생각하다 보니 전시한 칼을 바라보는 마음이 날 선 칼날처럼 예민해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기로 사용하는 칼을 예술 가치로 운운하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과 혀』 소설 속 세 인물이 한 식탁에 있는 장면에서 그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 세 사람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쓴다. 자기의 마음을 숨겨야 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러나 그들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한다. 첸은 모리를 죽이려 하고, 모리는 음식을 맘껏 즐기려 하고 길순은 사내들의 세계를 부수고 여성으로서 살아남으려 한다. 마음에 칼을 품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식탁이 전쟁터다. 도구와 무기로써 칼을 사용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세 사람.
일품 요리사는 살인자가 되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령관은 인간 본연의 행복을 욕망하고, 위안부는 생존자가 되기 위해 속마음을 숨긴다. 마음에 품고 있는 폭력성에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생존에 대한 첨예한 열망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도구로 사용한 칼과 무기로 사용한 칼이 같을 수는 없다. 첸은 도구로 사용한 칼로 마음에 품은 살인을 꿈꾼다. 칼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도 복수를 실현할 수 있는 자기의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
매일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이 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가 꼭 픽션일 수 없지만, 맛을 느끼는 영역은 픽션이다. 논픽션은 타인의 이야기이고 픽션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타인의 이야기에 자기의 이야기, 즉, 생각을 섞어 흥미로운 서사로 만든다. 재료를 섞어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가 흥미로운 서사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논픽션 사이에 분포한 픽션은 예술과 무관하지 않다. 눈꺼풀이 뒤집힐 정도로 배가 고픈 상태에서 시장이 반찬일 때 밥을 먹는 경우일지라도 그때 느끼는 포만감에 대한 환희는 픽션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 몸에만 돋는 소름 같은 것이다.
모든 논픽션을 자르고, 나누고, 다지고, 으깨어 픽션을 완성한다. 마치 칼을 사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목적과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