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사에 가려면 석문을 지나야 한다. 일주문인 셈이다. 석문은 커다란 바위 하나와 작은 바위 하나로 만들어진 통로다. 그런데 두 바위 모습이 특이하다. 작은 바위는 안정감이 있는 반면에 큰 바위는 영 불안해 보인다. 큰 바위는 작은 바위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땅에 닿은 부분이 살짝 들려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큰 바위를 지탱하는 쪽이 작은 바위처럼 보인다. 두 바위가 서로 기대어 만들어진 삼각형 공간이 석문이며 그곳으로 사람이 드나든다.
그녀는 발길이 닿는 곳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점점 격해지는 감정을 다스릴 그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k와 마주하는 눈길이 증오로 불타오르는 순간을 피하고 싶어서. 더 이상 나빠진 감정이 그 어디까지는 갈 수 없으니, 그러면 안 되니까. 서로의 분노를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터져버릴 것 같은 공격성으로 관계를 지탱할 수는 없지 않은가. 농담이 비웃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려면 생각을 정화해야 한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k와의 관계에서 방어적이면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격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원인을 생각하기를 여러 번, ‘수치심’ 수준으로 떨어진 자존심을 어디에서 찾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책임감과 k의 정체성이 팽팽히 맞서던 일이 극심한 피로로 다가오면서 그 피로감이 그녀를 산속으로 밀어 넣는다.
처음 오는 대둔산 산사. 꽤 높은 이곳에 오는 길이 낯설지 않은 것은 자연이 주는 위로였을까. 봄기운으로 기대에 차 있는 나무들은 푸르른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면서 생전 처음 보는 그녀를, 잘못이나 오류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는 그녀를 반기고 있다. 나무를 스쳐 지나며 k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무에게 물어본다. 나무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혼신을 다하며 그저 묵묵히 있을 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은 잘못된 에너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참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소리치고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k가 마음 문을 닫아버리며 그녀를 거부한 것이 어찌 k의 잘못이겠는가. k의 분출하는 거절하는 마음 표현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빈틈없는 욕심이, 그녀와 k를 연결하는 느슨한 실 같은 느낌이 그녀를 미치게 하는 것이 어떻게 k의 탓이겠는가.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k의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뱉어버린 많은 괴변이 그녀를 지켜주기는커녕 수치심으로 추락한 인간의 허망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는데. 말은 생각보다 큰 상처를 냈고 그 상처가 아파 신음하는 불통. 자존심은 막강한 부정(否定)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럴수록 k는 마음 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가버리지 않는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망하게 눈을 돌려버리지 않는가. k의 마음에 있는 분노가 녹아버리기나 할까. 하고 싶은 외계어 비슷한 언어를 뭉개버리기는 할까.
숨어있는 작은 것에 몰두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었던 사람은 땅속에서 자잘하게 뿌리가 자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숨어있는 것들을 없애려는 마음이 있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더구나 없애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작은 것들이 우주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저 작을 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잘것없는 어떤 유형이나 무형의 존재가 결코 숨어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던 자신을 만나고는 놀란다는 것을, 그 마음이 휘청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작고 작은 것들의 분열과 연결로 관계가 형성된다. 애매하고 다중적인 세상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질서는 작은 것들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작은 불씨, 작은 빛, 작은 먼지, 작은 빗줄기, 작은 싹, 작은 마음, 작은 상실, 작은 혐오, 작은 거짓, 등. 세상의 모든 작은 것의 사랑과 혼돈이 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은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적은 가능성이라는 것을 알면서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대체로 이해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안다면 ‘대체로’가 될 수 없다.
언젠가는 우주의 틈으로 알 수밖에 없는 것들. 끈질기게 지속하는 삶의 비결, 암울한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일들은 그 작은 것들의 미세함에서 뿜어내는 생명력인 것을.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 죽음을 앞둔 미켈란젤로의 마음이, 평화와 안식이, 서로 의지하는 모자의 마음이 미완성 작품에 남아있다. 미완성이기에 가공하지 못했던 생생함과 파괴적인 분노조차 창조적이다. 부축하는 예수와 부축받는 성모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가공하지 않은 성모의 뒷모습과 그 몸에 녹아든 예수의 앞모습은 평안이다. 완전히 허물어진 두 사람은 하나의 질감으로 표현된다. 미켈란젤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귀결을 가져온 작품은 미완성이기에 가능하다.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석문을 지나며 속내를 드러내는 일에 용기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이 몰랐던, 그녀도 미처 몰랐던 분분한 그녀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한다. 작은 혐오가 분열을 일으켜 마음의 폭풍을 겪기도 하지만, 작은 불씨로 어두운 현실을 걸어갈 힘의 존재를 고백하려 한다. 아예 여닫을 문짝이 없으니 갈등을 겪어 온 지난 일들, 어리고 작은 생명에게 억지를 부린 이야기를, 마음 판에 새겨진 아뜩하고 무거운 짐을 마음 놓고 내려놓으려 한다. 문이 닫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작은 불안도 사라질 것이다
이토록 단단한 돌도 서로 기대어 문을 만든다. 크고 작은 것으로 구별하고, 구별되는 관념은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일에서는 별 의미가 없음을 생각한다. 석문을 지나며 오만하고 부정적이었던 자가당착적 자존심을 날려버린다. 불안한 에너지였던 그녀의 병든 마음은 독경 소리에 묻혀 대둔산 자락에서 부서진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풍경소리가 감정의 잔여물을 데리고 산자락으로 울려 퍼진다.
그녀의 독백이 k에게 녹아들기를…. k의 앞모습과 그녀의 뒷모습은 모호한 경계가 되어 슬픔을 번역한다. 슬픔의 알갱이가 터지듯, 온몸이 전율한다. 피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