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립니다. 하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하얀 새해를 맞이합니다. 날씨가 추워서 내린 눈이 녹지 않았는데도 또다시 전위예술처럼 나풀나풀, 빙그르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눈이 오고 있습니다. 눈 쌓인 거리를 가로등이 환하게 비춥니다. 가로등 불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반딧불처럼 보이게 합니다. 시야 속 작은 차이를 단순하게 만들어 조용히 덮어버리는 눈. 딱딱한 시선을 솜처럼 폭신폭신하게 하는 눈,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가 흰눈에서 반사하는 빛으로 환합니다. 희미하고 몽롱한 빛이 추억 열차를 소환합니다. 휘날리는 눈을 헤치며 선로 위를 달려오는 기차를 상상하니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 ‘맨발의 이사도라’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가끔씩 그녀의 집 대문 편지통에 넣어 두고 간 아름다운 글 다발. 만져지지 않는 미래가 그녀의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고 느끼던 시기에 읽고 또 읽었던 문장들. 비밀스럽게 읽어 보고 소리 내어 읽어 보기를 여러 번,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꺼내 읽을 때마다 눈처럼 하얀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다음 글을 기다리며 설레던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언어의 색채. 아침이면 그 사람의 글이 편지함에 있을지를 기대하며 마당을 가로지르던 발걸음과 설레는 마음은 기묘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언제 다녀갔는지, 그 사람이 걸어왔을 거리를 생각하며 혹시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는 풍경은 분명히 기묘한 일입니다.
성향이나 지향이라는 낱말이 탁구공처럼 통통거리던, 감수성 부스러기가 풀풀 날리던 시절에 ‘밤의 플랫폼’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밤 뉴스가 끝나면 시작한 방송에서 성우는 매일 글을 읽어주었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미소와 외모와 부드러운 말씨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 연민으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마음으로도 사랑하지 마세요. 당신 위로 오래 받으면 우는 걸 잊고 그래서 당신 사랑까지 잃으면 어떡해요. 그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Elizkbeth Barret Browing의 「If Thou Must Love Me」- 장영희 번역)
성우는 아무 조건이 붙지 않는 사랑을 해달라는 영시를 읽어주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조건이 연민이나 외모가 아님을 부드러운 말씨로 읽어 주었습니다. 앞문으로 들어온 사랑이 뒷문으로 나가서 종내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이승의 사랑을 저승에서도 하고 싶지만, 사랑만으로는 부족한 가난한 부부의 사랑 이야기는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매일 한 편의 글을 라디오에서 듣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프로그램 시작을 알리는 음악, ‘맨발의 이사도라’는 이사도라 던컨이 자유롭게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그녀의 춤처럼 하늘거리는 상상은 충분히 감동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글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성우 목소리를 따라 적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많은 날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보낸 글 다발은 나풀나풀한 허위를 기록하거나 은은히 떠 있는 허상을 표현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추적하거나 최후의 진실을 증명하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유순해지는 마음이 무성하게 자라는 글이었습니다. 풀냄새 나는 마음을 은유하는 글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 ‘밤의 플랫폼’은 그 사람과 만나는 밤의 기차 정거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성우가 읽어주는 글을 들었고 그 사람은 성우가 낭독하는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려한 문장을 들으며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글을 써 내려갔는지는 모릅니다만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손놀림으로 성우 목소리에 귀 기울였을 겁니다. 휘갈겨 쓴 글을 다른 종이에 정갈하게 옮겨 적으며 감정 이입을 했을 겁니다. 아마도 그 사람의 감정이 전해져 그녀는 문학이란 꿈을 꾸었는지 모릅니다.
내일이면 왕창 내린 눈으로 도심은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녀도 아이의 등교를 걱정합니다. 이십 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두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지상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는 눈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치우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외출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언제부턴가 눈은 삶의 방해꾼이 되었지만, 눈 내리는 오늘 밤만은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우연히 듣게 된 그 사람 소식이 추억 열차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도로를 꽉 메우며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지난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소식을 들으니 눈송이 같은 그리움이 기적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또렷이 기억나는 일들이 그녀 발치에 서성입니다. 웅크리고 있던 추억이 살아납니다. 그 사람이 잘 살고 있다니 참 좋습니다. 그녀에게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남아 있는 그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그대로 정지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에 뒹구는 말이 늘어납니다. 그러다 엉켜버립니다. 뒤죽박죽 되어버린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아챌 수 있는 어휘가 있습니다. 어휘를 조용히 풀어내면 정갈한 문장이 됩니다. 문장은 현재를 응시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됩니다. 힘 없이 찢어진 추억 중 누구나 순수함을 간직한 추억 하나쯤이 그렇습니다. 오만가지 감정을 넣어둔 짐짝 같은 지난 일일지라도 홀로가 아니었음이 그렇습니다. 순수함이지요. 눈처럼 하얀 젊은 날의 열병이 사랑과 그리움으로 그대로 남아 있기에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신비로운 삶입니다. 그녀는 시간 밖으로 데리고 가는, 나이를 낚아채 가는, 삶을 무중력상태로 만드는, 그리움이 배어 있는 풍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지금 그녀는 글을 쓰고 그 사람은…. 깊은 밤, 그녀의 마음에 정차한 추억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려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추억이 손을 흔들고, 그녀도 손을 흔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