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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Feb 24. 2024

화가

바다로 간 화가 (모니카 페트 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 풀빛)

  화가는 오랫동안 큰 도시에서 살았단다. 도시에 있는 모든 것을 그렸어. 구석진 곳과 골목들, 집과 뒷마당, 작은 가게들과 햇빛에 바랜 차양, 먼지 낀 진열창과 앞에 내놓은 과일들, 식탁보가 나부끼는 거리 카페들을 그렸고 자동차와 버스, 역과 기차들을 그렸어.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그렸고 공원 상수리나무들과 둥그런 화단, 새똥으로 얼룩진 충혼비와 동물원을 그렸어.

  화가는 광고 벽화, 영화관과 오페라 극장, 감옥을 그렸어. 거리 악사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그리고 벤치에 있는 떠돌이도 그렸어. 게으른 고양이와 광장에서 재잘대는 비둘기도 그렸어. 호수와 시냇물, 쓰레기장도 그렸지.  화가는 점점 늙어갔어.  그리고 생각했지. 이제 무엇을 그릴까.

  화가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끝없이 넓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화가는 가난했기에 바다를 보기 위해 여행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지. 한동안,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어. 바다가 그려진 책을 보고, 여행 안내서를 들추고, 사람 말을 귀담아 들었지.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어. 너무나 바다가 보고 싶어서 잠을 이를 수도 없었지. 오직 바다만이 필요했던 거야. 화가는 바다에 가기 위해 돈을 모았어. 음식도 조금만 먹고 집에 있는 물건도 팔면서 기차표를 샀지.

  드디어 바닷가에 서 있었어. 얼마나 흥분되던지, 마음속 모든 말, 모든 생각이 조용해졌어.  바닷물은 하늘까지 맞닿았고 파도 되어 밀려와 모래를 핥고는 다시 물러섰어. 파도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같았고 멜로디는 화가 가슴 한가운데 파고들었지.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에 화가와 바다와 새로운 멜로디만 존재하는 것 같았어.

  화가는 날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렸어. 손가락들이 그 마음을 따라주지 못할 할 때도 있었지. 바다는 언제나 달랐어. 잿빛인가 하면 파란색이었고 초록빛인가 하면 마치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지. 삿싯대며 사납게 날뛰는가 하면 다시 탁자 위에 깔아 놓은 식탁보처럼 매끄럽고 평화로웠어. 밀물과 썰물을 그렸고 방파제와 집을 그렸어. 담에 기어오르는 장미도 그렸고 파도 거품과 함께 실려 오는 갈색 바닷말들도 그렸어. 또 모래 언덕과 모래사장의 빛바랜 말오줌나무도.

  항구의 고깃배, 나루터 옆의 나룻배도 그렸어. 게 잡는 어부들, 울타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 목장의 소와 둑 위의 양들, 땅을 가르듯 흐르는 도랑들과 그 위에 비친 조각난 하늘을 그렸고 섬사람들도 그렸어. 아침 일찍 동이 트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날이 저물 때까지 그림을 그렸어. 그가 발견한 것들을 모두 그렸단다.

  하지만, 아무리 검소하게 살아도 화가는 돈이 점점 줄어들었어. 화가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사주었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 했어.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지. 화가는 그림 한 뭉치와 돌멩이 한 줌, 조개 한 자루, 하얀 모래 한 봉지를 가지고 섬을 떠났어. 머릿속에 아직 그리지 못한 바다 풍경들로 가득 차 있었단다.

  도시로 돌아와 이젤 앞에서 기억을 그렸어. 화가가 그린 가장 아름다운 그림에는 바다가 보여. 바닷가 절벽 위에는 꽃이 정원이 있고 속에 갈대 지붕 작은 집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담쟁이와 장미 덩굴이 있는  그린 그림을 침대 위에 걸어놓았어. 지금까지 그린  가운데 가장 좋다고 생각했어. 누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언제나 말없이 고개를 저었단다. 그림이 어디가 특별한지 말하기는 어려. 보면 그냥 느껴지거든. 그것은 놀라운 빛을 지니고 있어. 지치지 않고 소리 없이 변하는 빛을. 바다처럼 말이야.

  바다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어. 그럴 돈이 없었으니까. 어느 날, 오후 화가는 방에 걸어 둔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림 속 작은 집 문이 빠끔 열려 있는 거야. 잘 못 본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눈을 비비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니까 조금 더 문이 열리는 거야. 그 안을 들여다보니 아늑한 방이 보였고 이젤이 놓여 있었어. 화가는 그림으로 다가갔지. 그 때, 그림이 화가를 들여보내 주는 거야. 활짝 열린 문으로.

  화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전혀 놀라지 않았어. 당연하다는 듯이 그림 속 방으로 들어가 이젤 앞에 앉았단다.

  날마다 오후가 되면 화가는 도시를 떠나 그림 속으로 들어갔어. 모래사장 따라 산책하며 돌멩이도 줍고 물에 떠내려온 것을 주웠지. 그림 속은 언제나 여름이었거든. 잠들기 전에는 파도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지. 화가는 깊은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도시로 돌아왔어.

  어는 날 아침, 화가는 이제 도시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 그림은 지금 도시 미술관에 걸려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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