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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맑은물 Jul 31. 2024

좋아한다, 존경한다

2024 [월간문학] 8월호 원고

  혼자가 아닌 상태를 흔들어 대며 피곤함으로 다가오는 형상들이 눈앞에서 아롱댈 때, 왜 그런지 생각한다. 더구나 그 이유가 극복해야 할 과제나 내 삶에 남아있는 숙제로 느껴지면 고민한다. 움찔움찔 내면으로 파고드는 고민에 소심하게 반응하는 내 감정에 놀라면서 잘 살기 위해서 무엇을 직시하며 살아가야 하나 걱정한다. 그러다 보면 무엇을 피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또 걱정한다.  

   

  마종기 시집 『이슬의 눈』(문학과 지성사, 2009)에서 만난 문장이다.


  나는 둔한 사람보다 빠른 사람을 좋아한다. 빠른 사람보다는 정확한 사람을, 그보다는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용기 있는 사람보다는 나는 정직한 사람을 존경한다. 정직한 사람보다는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러나 옳은 사람보다는 나는 착한 사람을  존경한다.    

 

  이 문장을 읽으니 김소연 시인 글이 떠오른다. 김 시인은 좋아한다는 것은 호감에 대한 일차적인 정서이면서도 정확하게 분화하지 않은(‘분화되지 않은’이 아닌) 상태를 뭉뚱그릴 때 쓰기 좋은 말이며, 존경한다는 것은 이미 겸허히 흔들고 있는 백기이며, 적어도 한 수 아래임을 여실히 깨닫고 엎드리는 의식(儀式)과도 같다고 했다. (『마음사전』마음산책, 2008) 감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선망, 그래서 감정 바깥에 다소곳이 앉아 있어 그만큼 깨끗하고 단정한 감정이 존경이라는 것.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두 시인 생각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지 생각해 본다.  

    

  나도 마종기 시인처럼 정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의사표시를 정확하게 하고, 돈 계산과 시간 약속에 관한 신뢰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명확한 자기 의사를 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표현하는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겁함으로 어물어물 넘어가다 보면 예의를 빙자한 가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정확함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무례가 아닌 존중을 느낀다. 그렇게 행동한 사람은 결과에 대해서도 묵비권으로 의뭉스럽게 비껴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행동이란 그만큼 책임지고자 하는 의사로 이해한다.  

  지행합일, 언행일치 등,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직설적인 표현 이면에서 오는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사람과 소통하는 일차적이며 기본적인 정서이기에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 어리둥절한 상황에 대한 지겨움을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장 행간에 의미가 있듯이 말 사이에도 의미가 있다. 문장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말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반대로 삶을 피폐하게 하기도 한다. 밤이나 도토리 속껍질처럼 말 보늬를 알아채는 것이 힘들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파악하다가 지레 뒤로 넘어간다.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본디부터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꾸밈없는 참마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말속에 담긴 의중을 찾다가 허둥대는 자기를 발견할 때, 혹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 자책하는 일은 정말 재미없다.      

  나는 정확하고 용기 있으며 정직한 사람을 존경한다. 정확하고 용기 있고 정직하면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을 더 존경한다. 옳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위인임이 틀림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사람들, 옳은 일 하다가 맞닥뜨리는 불의와 겨루며 그 일을 지속하는 사람들에게 백기를 든다.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이다. 위인전에서 만났던 위인처럼 그렇게 빛나는 사람을 일상에서 만난다는 것은 숙연한 정서다.

  옳은 사람보다 착한 사람을 매우 존경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언제부턴가 착한 사람을 더 존경한다는 마종기 시인 생각에 동의지 않는다. 그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존경한다는 시어에 ‘더’라는 부사로 강조한 것은 아마도,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인간이 가장 착할 때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아닐까. ‘선한 인간은 오직 죽은 인간’이라는 어느 철학자 아포리즘과 일맥상통한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착하다는 말은 왠지 권위에 길든 정서로 들린다. 참고 참아내는 사람에게 견뎌낸 시간에 따라 새겨진 나이테처럼 말이다. 결국 유린당하기 쉬운 힘없는 삶들에 착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실현 불가능한 그 희망을 강력하게 주입하는 정서 같아 그렇다. 마치 가스라이팅 같은 것.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면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온순하고 유순하게 있다가는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 빼앗기는 것이 많아지는 세상 불안이 불안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리고 빼앗겨본 사람 눈에 어찌 세상이 착하게 보일 것인가. 착하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착한 척하면서 나쁜 사람이 정말 나쁜 것이다. 나쁜 한 사람이 나쁜 세상을 만드는 걸 우리는 오랫동안 경험해 왔다. 나쁜 사람 한 명이 세상을 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다. 옳은 길을 가려는 뚝심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정확한 판단으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한 현실이지만, 나쁜 사람들 속성도 다양하게 변하면서 착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도 현실이다.      


  ‘착하다’는 말은 순하다, 온순하다, 부드럽다는 뜻으로 혼용된다. ‘착하다’에 맞서는 말은 ‘악하다’인데 악하다는 것은 ‘인간이 합의한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쁘다’라는 의미다. 결국 착한 사람 세상이란 도덕적으로 나쁘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는 것인데, 이런 세상이 된다면, 착한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정확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 옳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시들해진다. 현실성 없는 꿈 놀이로 끝날 가능성이 크고 온순한 마음으로 세상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록 꿈동산 유희에 불과할지라도 유순하고 부드러운 세상을 꿈꾸면서 정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할 것이며 정직하고 옳은 길 가는 사람을 존경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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