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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진 Jan 25. 2024

흐르지 않는 물길에서

교실 한 구석에서 내가 선물했던 그림을 주운 적이 있다. 중학생 때,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자기도 한 장 그려달라고 졸랐기에, 가끔씩 스프링 연습장 한 장을 북 뜯어 한 장 건네곤 했다. 그렇게 친구에게 준 그림 중 한 장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겨져 있었다. 누구에게 준 것인지, 무엇을 주제로 한 것인지 잊었을 정도로 특별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의 주름과 여기저기 검게 번진 얼룩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작업실 근처 백화점의 아케이드를 걸을 때마다, 그 주름과 얼룩이 떠오른다. 이 아케이드가 처음 완공 되었을 때, 이곳에는 LED 화면으로 만든 시냇물이 흘렀다. 그 속에는 픽셀로 이루어진 네모난 물결이 반짝였고, 사람들은 픽셀 수련잎 아래로 헤엄치는 픽셀 금붕어를 따라 픽셀 물길 위를 걸었다. 예쁜 풍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픽셀 물길은 표면에 작은 흠집이 생겨 뿌예지거나 검게 전원이 꺼져 있는 날이 많아지는가 싶더니, 결국 검은 시트지에 뒤덮이고 말았다. 이제 그 아케이드에는 특별 기획 행사 제품들의 부스들이 계절마다 번갈아 들어선다. 주름, 혹은 얼룩 같기도 한 그 검은 시트지 위로.


이 픽셀 시냇물을 설계한 사람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지 않길 바란다. 그가 그려낸 시냇물을 폭 덮어버린 이 시트지가 그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을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 늦은 밤, 이제는 그 어떤 픽셀도 흐르지 않는 그 물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본다. 어디서 연습장을 북 뜯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1년 1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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