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까스, 기억을 더듬는 소울푸드

현실에 도망치고 싶을 때

by 나율



오랜만에 친구들과 야외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창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라 동네를 벗어나 만난 적은 드문 편인데

결혼한 친구 덕분에 약속은 시내 중앙통으로 정해졌다.


제법 겨울 낌새를 내는 바람소리가

병원을 퇴원한 지 얼마 안된 내게 경고라도 하듯 윙윙 귓전에서 울어대지만 바깥 공기가 너무 간만이라 되려 더 설레게 한다.


잠깐 바람소리와 사람 소리에 묻혀

중앙통의 분위기에 물들어갈 무렵 친구들이 모두 도착했다.

느긋하지만 반가운 말투가 오가고

역시나 그 말 끝엔 뭐 먹을래가 꼬릿말처럼 달린다.

나의 편견이라면 편견일지 모르지만 남자들이 술 없이 모임가지기 힘들다면 여자들은 음식없으면 모임을 가지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위 말에 공감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말을 수정하겠다.

적어도 내게만큼은 음식없는 모임,디저트 없는 모임은 앙금빠진 단팥빵이오, 우유없이 먹는 카스텔라나 다름없다.


그만큼 모임에서 ‘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그 비중을 자랑하듯 메뉴 선정에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이 한끼에 도박이라도 하듯 말이다.


모인 사람의 수보다 약 2-3배가량 많은 메뉴들이 쏟아진다.

저마다 매운것, 덜매운것, 안매운것.

국물있는 것, 없는 것, 자작한 것.

면이냐 밥이냐 , 면먹고 밥이냐.

기타 등등 .


항목별로, 조항별로 그 취향의 갈래가 무한대로 늘어나버리니 저마다 원하는 것도 다르다.

다행인 것은 나의 친구들은 메뉴에는 까다로울지라도 깔끔하고 핫한 매장이 아니라도 괜찮아하는, 인테리어엔 관심이 적은 아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추위도 피할 겸 선택한 곳은 비빔국수로 유명한 가게.

평범하지만 넓고 깨끗한 그야말로 전형적인 식당이다.

국수라는 간판을 내건 이상 이 집은 국수에 사활을 걸었음이 틀림 없다.

예상대로 메뉴는 단순한 편이었다.

비빔,물비빔,잔치국수.

거기에 사이드메뉴로 적당히 골라진 군만두와 고기만두가 있다.

녹색의 메뉴판을 쭉 훑어보다 친구들에게 대뜸 내 주문부터 내질렀다.


“난 돈까스”


친구들은 곧장 그래라고 대답해주었지만

메뉴 선정이 끝날 쯤 친구 중 하나가 묻는다.

퇴원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돈까스 먹어도 되냐,

아무튼 넌 돈까스 정말 좋아하나보다 . 하고


그러하다.
돈까스는 가히 나의 소울 푸드 .
입맛이 없어도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치킨과 돈까스 중 고르라한다면 난 돈까스요.
파스타와 돈까스 중 고르라 한다면 이 역시 돈까스다.

이렇게 돈까스에 온통 마음을 뺏긴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과거에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참 무섭다.

지금은 거의 기억도 안나는 그 오랜 과거에서 유일하게 그 순간만큼은 어제의 일인 마냥 선명하게 그려진다.


내게 돈까스의 기억을 진하게 남긴 겨울 어느 밤.

그 날의 냄새와 분위기 같은 것들은 기억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 필름을 돌리듯 되살아난다.


누구나 가지는 소울 푸드의 기억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 어린 시절에 외식이라면서 먹었던 소스 듬뿍 올라간 얇은 돈까스를 좋아한다.
물론 기름이 눅눅한 돈까스는 싫지만

왠만하면 경양식 돈까스는 평타는 한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 그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빨간색 등받이가 동글동글 돌아가는 의자에 앉아서 벽에 걸린 거대한 돈까스 그림을 보며
지금의 내 나이 또래 엄마와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늦게 오는 금요일 저녁 밤이면 집 근처, 대로변으로 창이 크게 보이는 그 돈까스 집에 둘이 도란도란 앉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이야기의 대부분은 내가 무언가를 물어보고 엄마가 대답하는 식이었지만.)

아빠는 언제오려나 기다리면서도 가게 안을 가득 메우는 고소하고 달큰한 돈까스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아빠가 늦게 오는 날이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돈까스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뜨끈한 스프라는 든든한 동료와 함께 엄마와 내 앞으로 놓여진다.


돈까스를 자르는 동안에도 냄새를 풍겨대는

루로 만든 고소한 크림스프(요즘 것과 다른 풍미가 있었다.),

마요네즈 듬뿍 발려진 마카로니 샐러드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다.) , 달콤한 강낭콩조림, 통조림에서 나왔겠지만 달큰한 옥수수, 역시나 통조림이 출처임이 분명한 후르츠 칵테일까지 완벽한 조합이다.

어린 내게 직접 썰어보라 은색의 나이프와 포크를 맡겨주고 영차영차 썰어대는 나를 보며 웃어주던 엄마와 결국 엄마에게 다시 나이프를 돌려주고 허기을 채우려고 먼저 마카로니를 찍어먹던 어린 시절의 나.


아저씨 혼자 운영하던 돈까스 가게는 20평 남짓 자그마했던 기억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을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드는거지 하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일기장에 돈까스가게사장이 되고 싶다고 적기도 했다.)


비디오방에서 요술공주가 나오는 비디오테잎을 빌려서 횡단보도를 건너 모퉁이에 자리한 붉은 치장의 작은 가게.

사람이 많은 것은 본 기억이 없지만 엄마와 나의 외출이라고 하면 거의 이곳이 최종 목적지였던 것 같다.

또래 친구가 하나밖에 없던 작은 골목 , 아랫층에는 무섭지만 맛난 것도 나눠주는 집주인 할머니가 사는 주택 2층집.

돈까스 집을 시작으로 나의 작은 세계가 골목골목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그 집 돈까스라고 믿던 바보처럼 순수했던 그 때.

누군가는 싸구려 돈까스를 좋아하는 나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도 종종 그때 그 맛을 찾아 먹다보면 왠지 이맛은 아닌데 할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돈까스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순간에 도망치고 싶을 때, 나를 그 행복했던 기억으로 데려가주는 유일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눈과 귀가 있는 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어떤 날.

나는 어떤 음식보다도 돈까스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