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처럼 걸쭉한 기억' (재닛 피치의 작품에서)

2024.3.5.

by 친절한 James


밤이 깊어갔다.

시계는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하늘은 캄캄한 향기로 뒤덮여

아침의 온기를 꿈꾸고 있었다.


U는 서재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서재라고 해도 별 건 없고

작은 방 한쪽 벽에 뚱뚱한 책장이

각종 책들을 머금고 서 있는 곳,

오랜 햇살의 흔적에 색이 바랜

밤색 독서대가 팔짱을 끼고

무뚝뚝한 눈길을 비추는 곳이지.

창백한 LED 등이

비척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어두운 방 한 구석이

허옇게 부풀어 올랐다.

해외여행 때 사 모은

작은 캐릭터 조각상들이

책상 구석에서 조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별일 없었니.


U는 이맘때쯤 글을 썼다.

짧을 때는 10여 분,

길 때는 1시간가량 걸렸다.

글 쓰는 방법은 매번 달랐다.

땅에 내린 지 일주일쯤 지나

잿빛 표정을 담은 눈송이 색깔의

무선 스프링 재생 노트에

0.7mm 파란색 펜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또는 노트북 메모장 프로그램에

생각나는 대로 타이핑을 갈기기도 했다.

한글 프로그램은

뭔가 좀 격식이 들어간 것 같은데

메모장은 그 정도 부담은 없단 말이지.

일단 떠오르는 글감을 화면에 적어두고

표현과 순서를 다듬으며

글을 완성해 나갔다.


U에게 글쓰기란

자기 위안이자 기억의 낚시질이었다.

일상을 헤엄치며 겪은 일들,

그 속에 떠오른 감정과 생각을

쏟아내고 풀어내는 위로의 여백.

그리고 묵혀 둔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

매일 테마를 정해 글을 썼는데

주제문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잡아

글자를 흩뿌려 나갔다.

어떤 내용은 그동안 잊고 있던,

또는 잃고 있던

추억과 사람을 의식 위로 끄집어내었다.

월척을 낚듯 뿌듯할 때도 있고

진흙처럼 걸쭉한 기억이

하루를 문질러 댈 때도 있었다.

견딜만한 때도 있는데

어쩔 때는 개펄보다 질퍽대는

어지러운 옛 시간이 일상을

집어삼킬 때도 있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글로 써서 읽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같은 생각을 해도

감정 소모가 덜했다.

응어리가 해소된 느낌이랄까.


오늘도 U는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만년필을 들었다.

이번엔 시를 한 편 써볼까.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 깜빡거리는

머나먼 회상 한 조각을

얇게 펴서 모자이크를

만들어 볼까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예쁘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괜찮아.

의식의 흐름을 타고

무의식의 얼룩이

손으로 전해져

종이에 피어나는 시간,

아무 걱정도, 아픔도 없이

온전히 여기에 머무는 순간.


이제 자러 가야겠다.

U는 글씨의 아지랑이가 가득한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푸른 하늘에 새큼한 별사탕 가루가

흩날리던 5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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