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여인' (로저 에이플론의 작품에서)

2024.3.6.

by 친절한 James


오늘도 그녀가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H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야식을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OTT에서 드라마를 보며 뒹굴거리니

금방 새벽이 되었다. 이전 직장은

주말에 쉬니까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격주 토요일 근무라

금요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늦잠을 잤을까.

후회해도 지금은 소용없는걸.


H의 직장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근처,

지하철 역과도 멀지 않았다.

주말에는 방문 차량이 줄을 섰다.

H는 대형마트에서 일했다.

납품된 식자재를 정리하고 옮겼다.

지난달부터 냉동식품을 주로 다뤘는데

상자의 무게가 상당했다.

새 직장으로 옮긴 지

2달이 조금 넘었는데

일이 아직 익숙지 않아

곳곳에 멍들고 담도 걸렸다. 파스는

붙이는 것보다 바르는 게 더 편했다.

고달픈 월급쟁이 신세였지만

지난주부터 하나의 일정이 생겼다.

대단하다고 할만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출근길마다 보는 풍경이니까.


마트와 멀지 않은 곳에

주택 단지가 있었다.

타운하우스는 아니지만

나름 쾌적한 주거지 같았다.

언젠가 직장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주변을 돌아본 적이 있다.

바로 출근하긴 싫고 동네를 둘러본 적은

없어서 호기심에 거닐다가

그녀를 보았다. 2층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녀.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얼굴이 떠올랐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시간에

창가의 여인은 같은 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H는 출근 전 그 집을 지나가는 게

루틴이 되었다. 일부러 돌아가야 했지만

괜찮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길을 걸으며 잠깐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다시 걸음을 이어갔지만 말이다.


뭐가 그리 H의 마음을 끌었을까.

외모일까. 글쎄,

어디서 본 듯한데 잘은 모르겠다.

표정일까.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리움 가득한 눈길 속에

미소가 있고 걱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는 듯해.

저렇게 애틋한 기다림은

누구를 향한 걸까.

한때 H도 삶 속에서 그런 눈빛을

담았던 때가 있었다.

보고 싶고, 가슴이 타오르는

그런 나날들. 돌아가고 싶구나.

지금은 월세를 걱정하고

연애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기에

옛 시간이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바쁜 출근길 속

잠시나마 나만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시선을 던져주는 그대,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조심스레 설레는 마음 담아 봅니다.

언젠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그날이 올는지 모르겠다.

H는 오늘도 그녀를 지나쳐 길을 걸었다.

혼자만의 상념을 가득 품은 채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6화'진흙처럼 걸쭉한 기억' (재닛 피치의 작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