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뒤쪽에서
2024.6.1.
by
친절한 James
Jun 1. 2024
낡고 빛바랜 벽장,
옅어지는 추억을 입은
갈색 밤나무 벽장 뒤쪽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편지봉투를 꺼내든 건
어제저녁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을 천천히 거닐던 K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거실 벽을 따라
손을 짚어가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벽뒤에 숨은 누군가를 찾듯,
벽지의 색감과
벽돌의 감촉과
벽장의 온기를
샅샅이 끄집어내려는 듯.
어느덧 벽장에 손길이 닿은 K는
잠시 멈칫했다.
딱딱한 벽장 모서리 속에 숨어있는
어떤 물컹한 물체가 튀어나오듯
전혀 다른 느낌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차갑고
또 조금은 따스한,
그러나 가루처럼
흩어져 버리는 짧은 감각.
천천히 한숨을 내쉰 K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앞을 보며
벽장 뒤쪽에 한 손을 쓱 밀어 넣었다.
K가 손을 넣었다기보다
벽장이 K의 손을 끌어당긴 듯
K는 그저 뻗어가는 자신의 팔이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벽장 뒤쪽을 훑으며 내려가다가
검지 손톱에 무언가 탁 걸렸다.
아, 어제 손톱을 못 깎았는데...
K는 중얼거리며 엄지와 검지로
그 무언가를 조심스레 집어 들어
밖으로 꺼냈다.
아... 이건...
K의 얼굴에
씁쓸하고도 멋쩍은
옅은 미소가 번졌다.
미소, 세상의 모든
엉킨 것과 꼬인 것을
푸는 곡선이라던데
이때만큼은 K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모래가 새어 들어간 신발을 신은 듯
K의 가슴에 미세하고 까끌까끌한
애련이 조금씩 굴러다녔다.
그때였구나.
벌써 10년도 더 전에...
한동안 K는 누런 먼지 속
편지봉투를 두 손으로
얌전히 들고 있었다.
뒷면을 뒤집어보지도 못하고,
편지지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시간이 멈춘 듯 우두커니 서서
편지봉투에 붙은 작은
보랏빛 스티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K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하지를 앞둔 늦봄의 노을이
느릿느릿 퍼져갔다.
좀 앉아야겠어.
K는 게으른 걸음을 옮기다
풍성해 보이지만 퍽퍽한
연초록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물속에 뛰어든 다이빙 선수처럼
K는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몇 cm 밖에 되지 않을,
소파의 탄성력이 허용하는 깊이마저도
K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동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또다시 한숨.
미적지근한 기분,
가슴 한가운데 작고 몽글몽글한
구슬젤리가 굴러다니는 것 같네.
겉에 홈이 파이고 작은 돌기가 있어서
젤리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10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며칠 전에도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뭐랄까, 세상의 모든 산(山)은
각자의 높이나 특성이 달라도
'산'이라는 하나의 말로 묶이듯
같은 듯 다른 이 느낌이
K는 좋지 않지만 싫지도 않았다.
이제 일어나야겠군.
K가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벽장으로 향하던 K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물 한 잔 해야지.
K는 제일 아끼던, 그래서 특별한 날에만
찬장에서 꺼내 쓰던
코발트색 크리스털 잔을 손에 쥐었다.
이 잔잔하고 영롱한 색깔이여,
넓고 푸른 이국의 어느 바다,
그 속에서 거닐던 너와 나,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바라보고
해변에서 그렇게
웃고 나눈 시간들이
새겨진 유리잔.
조심스레 공들여 씻는 물 잔.
혹시나 물들까
커피나 음료수는 담지 않고
오직 생수만 담아 마시던 잔.
요리조리 구석구석 살피던 K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물을 따랐다.
지난 시간들을 이제는 물로 씻어
잊으려는 듯.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도 또 언젠가
다시 그럴 거란 듯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상념이
이 컵을 쓸 때마다 느껴졌다.
그래서 찬장에서 잘 꺼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 한 잔으로
목 타는 그리움이 해소되기를,
K는 헛된 바람을 다시 소망해 보았다.
벽장 뒤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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