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오늘은 망했다
어릴 적 내겐 괴짜같은 버릇이 하나 있었다. 무언가 오늘 하루가 목표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벽에 기대 열을 세고는 다시 눈을 떠 마치 아침에 막 일어난 것처럼 새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위 ‘오늘은 망했다’는 판단이 서면 좀처럼 잘 해 볼 마음이 들지 않아 스스로 내린 일종의 처방이었다. 증상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시작증후군’쯤 될까. 열 살배기의 앙큼한 술수에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여전히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지금, 한편 대견한 생각도 든다. 이젠 그런 깜찍한 처방일랑 듣지 않는 때묻은 어른이 되었다.
2019년이 밝은지 어느덧 한 주가 지났다. 연말연시 업무 마무리와 각종 모임, 가족 행사에 치여 좀처럼 엄두를 못 내다가 뒤늦게 책상 앞에 앉았다. 빳빳한 새 다이어리에 새해 목표를 하나씩 꾹꾹 눌러 써 내려가는 순간은 사뭇 경건하다. 대부분이 지난 해에도 비슷하게 쓰여 있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터. 단연 대표적인 것은 새해 목표 스테디셀러인 운동, 독서, 영어이다. 이쯤 되면 ‘생의 목표’로 인정하고 넘어갈 법도 한데 ‘평생 하겠다’와 ‘올해에는 꼭 하겠다’는 어쩐지 각오를 다르게 해 새해를 빌미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그만큼 새해가 주는 힘은 위대하다. “딱 하루 차인데 어쩜 그렇게 12월 31일이랑 1월 1일에 출석 차이가 많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아는 트레이너님 말씀이다. 영어 학원이나 금연클리닉도 사정은 매 한가지.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나를 포함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시작증후군을 앓고 있더라는 것이다. 가령 이미 한 대 피워버렸으니 ‘금연은 내년부터’랄지 이미 한 주나 놀아버렸으니 ‘학원은 다음 달부터’, 이미 망했으니 ‘다이어트는 내일부터’와 같은 약간의 죄책감과 크나 큰 해방감을 동반한 마법의 주문들. 덕분에 헬스장 등록율은 연초를 피크로 우하향하고, 중고서점엔 Chapter 1만 풀었다 지운 흔적이 역력한 영어 교재들이 산재한다.
시간은 인간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이다. 영화만 봐도 어딘가에 고립된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날을 헤아리는 것이지 않던가. 더 이상 시간의 경과를 가늠할 수 없게 될 때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 된다. 기약 없이 긴 시간은 순간의 소중함을 간과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생 중 하루와 1년 중 하루가 갖는 오늘의 무게는 결코 같은 수 없다. 분명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인데, ‘연도’라는 가상의 경계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명명하고 다시 나아갈 동기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 날의 시작은 반드시 연도가 아니어도 좋겠다.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뜨는 앙큼한 속임수까진 아니더라도 내 나름의 시작증후군 처방을 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해 중반 즈음 ‘이번 해는 망했어’ 포기해 버리는 위험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낮잠을 한 숨 푹 자고 일어나 뒷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것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말끔히 하고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일기를 쓰는 것도 좋겠다. 어차피 연월일시(年月日時) 조차 가상의 경계에 지나지 않으니 핑계의 여지는 없다. 그러니 나도 당신도, 올해에는 부디 포기 말라. 마음만 달리 먹으면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동아일보 2019.01.09자 게재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163/3/70040100000163/20190109/936103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