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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Dec 03. 2018

추억의 명수필 감상

계용묵의 구두 와 이정아의 구두 3제(三題)

한국수필 12월호

1.명수필-계용묵의 구두

2.계용묵의 구두를 읽고

3. 이정아의 구두 3제(三題)


*구두

계용묵(1904-1961)

구두 수선(修繕)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으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큼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번 힐끗 돌아다 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락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 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한참 석양 놀이 내려퍼지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鋪道) 위에서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 3보(步)만 더 내어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2, 3보라는 것도 그리 용이히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부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휑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나로서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출전: 한국의 명수필, 을유문화사 2013


*계용묵의 구두를 읽고- 이정아

계용묵(桂鎔默, 1904년 9월 8일 ~ 1961년 8월 9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수필가, 기자, 작가, 기업가이다. 본명은 하태용(河泰鏞) 으로 1904년 9월 8일 평북 선천 출생.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당에서 수학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1928년 일본에 건너가 토요대(東洋大學) 동양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된 바 있으며 1925년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의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된 이후이다. 이후 『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蛛)」(1928)를, 『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1935)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1938년에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3년에는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 좌우익 문단의 대립 속에 중간적 입장을 고수하며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사망하였다. 소설집 『병풍에 그린 닭이』(1944), 『백치 아다다』(1946), 『별을 헨다』(1950) 등과 수상집 『상아탑(象牙塔)』(1955)을 남겼다.

소설을 많이 썼으며 문장구사의 정확성으로 문장기교의 향상에 기여한 점, 소설창작의 기법을 수필에 시도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오늘 소개하는 수필 <구두>도 그런관점에서 감상해보기로한다.

이 작품은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 시킨다. 구두를 수선하면서 수선공이 쉬이 닳지말라며 뒷굽에 박아 놓은 징 때문에 요란한 소리가 나는 구두를 신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화를 재미 있게 엮었다. 아마 탭댄스를 출때의 탭슈즈처럼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일상생활에서 걸을때마다 탭소리가 났다면 상상만으로도 우습다.

체험한 당황스러운 내용을 시시각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평범한 소재를 놓치지 않고 관찰함으로 생활에서의 단상을 그려 내고 있다.  징을 박은 구두 발자국 소리 때문에 빚어지게 된 긴박한 한 순간을 포착해 쓴 체험담이고, 구두 소리로 인한 긴장감으로 인해 상대여성에게 불량배로 오해받는 결말을 그렸다.

 자신의 구두 징의 금속성 소리를 '또그닥 또그닥' 으로, 자신을 불량배로 착각하여 도망가는 여인의 구두소리를 '또각 또각' 의 의성어로 시간의 진행에 따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사건 이후 작가는 구두의 징을 빼버렸다. 징은 처음부터 맘에 안든 장치였다.  징의 금속성과 작가의 여린마음을 대비한 듯한 수필은 인생을 다양하게 해석한다. 소설가가 쓴 수필이어서 소설 속 한 장면 같기도하다. 이 글은 수필을 읽는 재미와 문학적 가치를 함께 갖추고 있다.


* 구두 3제(三題)-이정아


대학을 졸업하고 여자중학교의 가정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 전에 준비물을 챙기는데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중간 굽이 있는 빨간 가죽 슬리퍼였다. 여선생님들이 교내에서 실내화를 신은 것을 본 지라 여교사의 필수품이려니 하고 큰 맘먹고 명동의 양화점에서 마련한 것이다.

 학생들도 동료교사들도 예쁘다며 칭찬을 하고 내 별명은 ‘빨간 구두 선생님’이 되었다. 한 달 여쯤 지나자 교무주임 선생이 신임교사를 소집 한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있을거라는 귀뜀이어서 단정히 하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이 조목조목 지적을 한다. 긴 생머리가 학생인지 선생인지 구별이 안되니 퍼머를 하라는 분부가 나를 향한 것이었고, 우리나라는 아직 전시체제이므로 전시의 국민들은 슬리퍼를 한가하게 끌고 다녀선 안된다며 내 발을 보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78년도에 전시체제라니 이해불가였지만 이북 출신 또순이 여교장 선생님에겐  통일이 안된 나라의 상황이 전시로 생각되었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여교사를 보다못해  그런자리를 마련 하신 듯 싶은데, 그땐  사회인이 되어서도 왜 그런 제약을 받아야하나 야속했다. 별 수 없이 머리는 펌을 하고 실내화는 학생들과 같은 하얀 운동화로 바꾸었다. 30년전 이야기인데도 엊그제 일처럼 섭섭하다. 평소 구두를 좋아하는 내가 구두 때문에 받은 핍박이어서 그럴 것이다.
 
  며칠 전 북싸인회가 있었다. 북싸인회 준비로 여러가지 물품준비도 해야하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하건만, 나는 구두를 샀다. 아주 높은 킬 힐이다. 남들이 보면 “윗쪽 공기는 어떻수?”하고 물어볼만한 샌들이다. 키가 커 보이면 상대적으로 덜 퍼져보일 것이란 계산이었다. 당일 아침 미리 신고 연습을 하는데 너무 높아 삐끗하고  발목이 접혀져서 다쳤다. 그 신을 신어보기는 커녕 발이 너무 부어올라 가장 낮은 (굽이 아예 없는) 신발을 겨우 꿰고 참석하였다. 종일 발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인생은 이리 대책없거나 더 불리한 쪽으로 종종 진행되곤 한다. 그러니 매사에 무리수는 두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다. 사람잡는 신발이어서 킬 힐인 모양이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윤흥길 소설가의 오래전 소설제목이 생각난다. 내가 죽으면 ‘수십켤레의 구두로 남은 아줌마’가 될 정도로 신발이 많다. 오죽하면 남편이 나를 부를 때 종종‘임멜다여사’라고 할까? 두 식구만 남은 집의 현관에  남편 신발 한 켤레면 내 신발은 열이다.
 
  잘 알던 분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장의사에서 평소에 고인이 좋아하던 옷을 챙겨오라고 했다며  따님이 묻는다. 타주에 살던 고인의 딸은 엄마의  옷을 잘 모른다기에 집에가서 즐겨입던 옷을 찾아주었다. 그 옷과 매치하여 편한 신발도 들고 장의사에 갔더니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신발은 필요없단다. 주검은 영원히 자는 것이므로 잘 땐 신발을 안신는다나?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였다.
                                                            
 북 아메리카 인디안 수우족의 기도문 중 신발에 관한 금언이 있다. ‘남의 모카신을 신고  두 달이상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 는 말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라는 역지사지의  사상이 담긴 것이다. 이렇게 신발하나에도 철학이 담길 수 있다.
 
 죽을 땐 관 속에 넣어가지도 못할 신발, 생전에 실컷 신어봐야하겠다. 조만간 이 핑계를 대고 나는 또 신발 한 켤레 살 것이다. 불황의 여파로 전시체제와 다름없는 요즘엔 아무래도 질기고 튼튼한 군화같은 신발을 사야하려나?  홍 교장 선생님의 어드바이스를 떠 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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