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아 Jul 04. 2024

포도(鋪道)인 줄 알았는데

포도(Grape)였네

망신당한 잘난 척

이정아/수필가

오래전 아들아이가 대학 입학할 때였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짐을 잔뜩 싣고 학교로 가는 도중 살리나스에서 하루 묵었다. 노벨상의 작가인 존 스타인벡의 생가를 들러보고 싶어서였다. 발로 쓰는 수필가여도 유명한 소설가인 그의 기를 받고 싶었달까? 호텔에서 물으니 그의 집은 식당으로 바뀌었단다. 빅토리아 풍의 꽤 큰 집이었다. 레스토랑으로 변한 생가에서 밥 한 끼 먹고는 밀린 숙제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작품은 정작 읽은 것이 없고 영화로 만든 ‘에덴의 동쪽’을 보았을 뿐이다.

얼마 전 문학기행을 그곳으로 간다기에 바람도 쏘일 겸 따라나섰다. 이미 다녀온 곳이어서 그리 흥미롭진 않았어도 함께 동행하는 이들이 누군가에 따라 여행의 맛이 달라지니 말이다. 101 프리웨이를 달리며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였다. 살리나스에 가까워 오자 길 양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거였다.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가 있는 동네가 아닌가. 그걸 보고 K시인이 “이쪽도 분노의 포도, 저쪽도 분노의 포도”라고 하자 모두들 좌우로 고개를 돌려 구경한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새내기 수필가에게 내가 속삭였다. 존 스타인벡의 유명 소설인 ‘분노의 포도’는 그 과수원의 포도가 아니라 포도(鋪道) 즉‘포장도로’라고. 새내기 수필가는 하늘 같은 선배가 말하니 잘 알겠다는 듯이 끄덕인다.

그러고 나서 존 스타인벡 센터에 들렀다. 작품 하나하나 마다 구획을 만들어 놓고 작품의 배경이며 그 당시의 사진이며 소품을 전시해 놓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포장도로에 관한 책은 없어 보였다. ‘The Grapes of Wrath’의 책 표지가 크게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레이프라면 먹는 포도가 아닌가? 마침 옆에 서 계신 영문학을 전공한 선배께 여쭈었다. 퓰리처 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가 확실하다고 하신다. 대 공황 때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을 쓴 글이란다. 아뿔싸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인가? 내 머리엔 포장도로로 입력이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원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아는 척을 한, 나의 게으름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창피하지만 잘못된 정보였다고 새내기 수필가에게 이실직고하였다. 여행사 주차장으로 마중 나온 남편에게 그 망신살 에피소드를 말하였다. 그랬더니 자신도 분명 그레이프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다르게 설명을 하더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마누라의 말이니 의심하지 않았단다. 알려면 제대로 알고 확실하게 알기 전엔 입을 열지 말라나? 말 수 적은 자신은 어딜 가서 망신당할 확률이 낮단다. "아무리 남편이 도로포장을 하는 건설업에 종사하기로 서니..." 하는 바람에 배를 쥐고 웃었다.

내게 망신의 원인을 제공한 글을 찾기 위해 웹문서를 검색했더니, 다른 이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을 발견했다. 한국의 보수 논객인 이상돈 교수도 전에 분노의 포도에 대해 틀린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노라고 한다. 동지 만난 듯 반가웠다.

인터넷을 뒤진 끝에 드디어 이러한 구절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가난해도 서로 돕고 사는,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사는 곳을 꿈꾸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본질을 그 분노의 鋪道(포도)에서 깨닫게 되지요.’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소설 속 인물의 여정을‘분노의 길’로 중의적 표현을 한 우수한 독서 감상문이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감상문만 읽고서 잘난 척을 하면 이런 창피한 순간이 올 수 있다.

요즘 독서를 대신해 주는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바쁜 현대인에게 내용을 요약해서 패널들이 ‘전체의 대강’만 알려준다. 독서가 주는 본래의 취지와는 많은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지식인은 ‘읽지 않았으나 읽은’ 인간만 늘어났다고 한탄하지 않던가. 진정한 독서는 우리의 자아가 아니라 이상을 우선시하며, 그때의 책은 허영과 사색 사이를 메워준다.

큰 망신 덕에 존 스타인벡에 대한 공부를 확실히 하고 있다. 그 소설의 배경처럼 경제 공황의 시대를 사는 요즈음 ‘분노의 포도’가 언론에도 인구에도 많이 회자된다. 더구나 위대한 문필가 존 스타인벡과 같은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산다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겠다.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포도가 뿔나고 존 스타인벡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