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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Jun 27. 2022

아버지의 귤나무

독후감

 글은 수필집 <아버지의 귤나무> 읽고  글이다. 은퇴하고 2년 살기로 제주에 살고 있는 강진철 교수님이 제주에서 수필 공부하면서 독서동아리에서 함께 읽은 독후감을 쓰셨다.



<아버지의 귤나무> - 이정아 수필선, 선우미디어, 2022.


강진철이 쓰다


소설가인 누나가 자기와 아주 친한 페이스북 친구인 이정아 님이 수필집을 냈으니 사서 읽어 보라고 해서 마침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다음 달 책으로 선정해서 읽게 되었다.


마침 나도 근래에 수필을 써 볼까 궁리 중이었다. 내가 지난 2월에 대학교수에서 퇴직하기 전까지는 논문도 써보고 칼럼도 써 보고 독후감도 많이 써 봤기에 시와 소설보다는 수필은 그래도 만만해 보였다. 우연하게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에 등록하여 한 학기 수필 강의를 들어 본 결과 수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배울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다. 나는 그동안 글을 쓰면서도 내가 문학가가 되겠다는 각오가 없던 터라 수필이라는 문학의 장르를 눈여겨보지를 않았었다. 내가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 내 책장에 수필 종류의 책은 거의 없었다. 또한 수필가는 전문가 영역이었다.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에 맞는 집중적인 훈련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겠지. 뒤늦게 한 학기 동안 수필집과 수필 잡지를 집중적으로 읽었고 습작도 하고 있다. 그리고 수필 방면에서 관록이 있다는 분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정아’님도 그 분야에서는 저명인사였다.   


우선 이 책은 잘 읽힌다. 두 번째 읽으니까 더 좋다. 독서모임 참석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내용이 쉽고 편안하다고 했다. 수필이라는 성격에 맞게 소소한 일상생활에 관하여 조근조근 얘기를 하고 있는데 “차분한 설득과 조용한 파문”을 통해서 성찰과 감동을 하게 한다.


일상이라는 것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인데 나는 이 책에서 내 나름대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저자(이정아 님)는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가난했던 1955년에 태어났지만 좋은 집안에서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인천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유명인사와 어울릴 정도의 관록이 있는 기자-시인이고 어머니는 머리가 아주 좋았다. 그러니 저자는 공부도 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대는 공부가 인간의 운명을 거의 좌우하던 시대였다. 경기여고와 이대를 나와 남편을 만나고 교사생활을 7년 정도 하다가 유학을 가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서 잘 정착했다. 잘 태어난 덕분에 우여곡절이 없이 잘 자랐다는 얘기다.


저자는 살아가면서 나름 고민과 갈등도 있었겠지만 심각하거나 특별히 어려웠던 경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험에서 탈락 같은 것도 없었다. 성격도 무난했던 것 같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한데 저자는 친정과 시댁의 부모, 남편과 하나 있는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인다.


참 복 받은 경우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나이 들면서 더 느끼는 것인데 사람의 운명은 타고난 유전자와 집안의 배경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공부도 그렇고 예체능의 재능, 외모, 체질, 성실성, 성격 등도 대체로 그러하다고 나는 본다. 지금 현재 한국의 프로야구에서 예전에 ‘바람의 아들’로 이름을 날렸던 이종범 선수의 아들 이정후 선수가 타격 1위를 달리고 있다. 대단하다. 저런 경이적인 기록은 (나름 열심히 연습도 했겠지만) 유전자의 영향이 확실하다. 뉴스에는 주로 저런 것만 뜬다.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하나?


저자의 삶에 우여곡절이 없으니 “가감 없는 정직함이 기본”인 그의 수필은 가치가 그리고 재미가 덜한 것이 아닌가? 내용이 허구적인 소설에서는 갈등구조와 극적인 전개가 필수적이지만 수필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은 없어도 된다.


우리 아파트 바로 앞의 집 아주머니가 이대 출신이고 수필집 2권을 내신 중견 수필가다. 수필가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분도 50대가 되어서 늦게 등단하셨다. 그런데 저렇게 ‘Sweet Home’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전형적인 가정주부에게서 무슨 쓸거리가 나올까 했는데 그분 책들을 읽어 본 결과 수필에는 갈등과 불화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온 일상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다 소재가 되었다.


저자는 미국에서 다독상도 받고 독서감상문 대회에서 대상도 수상도 했다는 것을 보면 책도 많이 읽고 쓰기 훈련도 계속적으로 했을 것이다. 재주가 있더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이 책은 저자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생에 위안을 주는 수필 본연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행하는 교과서적인 수필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집에 나오는 글 하나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이역만리 미국에 살면서 이런 수필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썼는데 자연스러운 문장에다가 자랑하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수필의 미덕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 수필과 가족


수필이라는 것이 신변잡사에 관한 것이라 글에 가족과 친구들 또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래서 가끔 저자는 그들로부터 불평의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특히 작가의 가족은 숙명적으로 등장인물이 되어야 한다.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부모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무래도 부모와 엉켜서 살았던 세월만큼이나 여러 가지 사연도 많겠고 특히 과거의 가난이나 죽음과 관련된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재들도 많겠다. 그리고 부모는 돌아가셨거나 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 껄끄럽고 안 좋았던 일들도 거론하기가 부담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이 ‘아버지의 귤나무’이듯이 저자의 삶에 있어서 아버지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글 쓰는 재주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그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임하시고 미국에 사는 딸의 집에 와서 집을 돌보면서 귤나무를 심었는데 그 귤나무에서 귤이 열렸고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귤은 먹는 귤이 아니라 아버지의 분신 같은 것이다. 잔잔하고 애틋한 이야기다.


 저자의 아버지는 아마도 1928년생인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 같다. 술을 많이 드신 것도 우리 아버지와 같다. 그 당시 아버지들은 대체로 그러했다. 우리 아버지도 거의 매일 술을 드셨고 거나하게 취하여 집에 오셨다. 집에서는 술을 안 드셨고 밖에서 술을 얻어 드셨다(고 말하셨다). 저자의 아버지는 2001년에 70세 조금 넘어서 소천하신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많이 하셔서 56살에 위에 펑크(위가 헐어 위액이 새는 현상)가 나서 그 이후로 술을 못 드셨다. 그래서 77살까지 살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이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기도 이쪽저쪽으로 전근 다니면서 사귀었던 술친구들은 그전에 다 돌아가셨다. 나는 일생동안 마실 수 있는 ‘주량 총량의 법칙’을 믿는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는 56살에 그 총량을 다 채웠다. 그 당시 아버지들은 술이 취하여 집에 오면 마누라 패고 자는 아이들 깨워 못살게 구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히도 저자의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는 그런 케이스는 아니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어머니 얘기도 언급된다. 성악을 공부했고 머리가 좋아서 계주 노릇을 잘했고 하숙도 치면서 씩씩하고 부지런하게 사신 분 같다. 아마도 우리 누나가 이런 종류의 수필을 쓴다고 하면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비중이 워낙 커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이 책에 나오는 것보다는 적게 나올 것 같다.


 이 책에는 저자의 남편 얘기도 많이 나온다. 대개 부부관계는 애증관계라 거론하기가 껄끄러운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다 보고 있는데 나쁜 얘기는 감추고 좋은 얘기만 쓰기가 좀 그렇고 나쁜 얘기를 쓰면 상대방이 삐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성격과 취향은 너무나 다르지만 참 특별난 관계다. 신장이 약했던 저자에게 남편이 신장 하나를 떼어 준 것이다. 부부간의 크고 작은 갈등관계가 왜 없었겠냐만 그 전에도 서로 믿고 사랑하여 부부관계가 아주 원만했던 것 같은데 이 일을 계기로 특히 더욱 그러했겠다. 수필에 이렇게 남편을 수시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것도 타에 모범이 되는 경우다. 참 좋아 보인다.    


* 종교 문제


나는 교회나 성당 그리고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 신심이 깊은 사람들을 특별히 선하다거나 정의롭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어본 신앙인들은 봉사도 많이 하고 나름 성실했지만 그것이 사회적-국가적으로 그리고 이웃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었다. 그들도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정치적으로 진영논리에 빠져 호불호가 확실했고 상대에 대하여 배타적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이기적이었고 탐욕스럽기도 했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더 편협하고 고집스러웠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데모하는 목사들이나 스님들을 보면 악마가 따로 없었다.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특별한 것은 없고 ‘노래는 잘하더라’고 누군가가 얘기한 것을 들었는데 내 생각도 딱 그 정도였다.  


저자는 기독교를 아주 절절하게 믿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국 땅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답게 특별히 더 반성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고 있다. 인종주의에 근거한 혐오와 차별이 극심한 미국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나 노숙자들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려 시도한다. 주님께 부끄럽지 않게. 이 정도면 진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믿을만하겠다.     


 저자는 1985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이국생활을 오래 했는데 글을 보면 (물론 미국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이국적인 냄새는 거의 안 나고 마치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쓰는 것 같이 한국적이고 자연스럽다. L.A.라는 교민 공동체에서 주로 생활해서 그런가? (이건 내 추측이다) 하기야 한나라에서만 쭉 사는 것 보다도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나라를 비교하면서 살다 보면 자기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실상이 더 잘 보일 수도 있다.


이 책의 106쪽에는 소설 쓰는 우리 누나의 인생 2 모작 얘기가 언급된다. 강남에서 서점을 운영하다가 나이 들어 소설집을 연달아 낸 일을 성공적인 인생의 2 모작의 사례로 들었다. 올해 65세로 공식적인 노인의 범주로 편입되는 나도 2 모작을 해야 하나?     


이 책은 수필이 가질 수 있는 기법과 장점을 두루 가지고 있다. 절제되고 적절한 문체와 묘사는 수필의 표본에 가깝다.  


어느 수필가는 “글을 쓸 때마다 어디까지 속을 꺼내 보여야 할지 늘 저울추를 놓지 못하는 나다.” 고 했는데 (팩트 fact라 하더라도) 어디까지 자신과 가족을 드러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자랑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절제의 미덕이 꼭 필요한데 그렇다고 겸손이 지나치면 뭔가 옹색해진다.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되 독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 적정선을 잘 지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30년간에 걸친 오랜 글쓰기와 이런저런 수상 경력, 문학과 관련된 단체에서의 직책 같은 것이 저자의 글솜씨와 내공을 짐작케 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시행착오를 하고 후회하고 잘못을 반성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런 식으로 글로 쓰면서 자신에게 다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성찰이 깊어질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안이 되고. 그런 것이 수필의 효능이고 성숙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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