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아 Mar 31. 2023

땜빵하는 날

딴 주머니의 유혹을 버리고



이정아 / 수필가

    

가게에서 일하는 이가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어 몇 주간동안 내가 대신 야구 연습장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의 담당시간인 화·수·목 3일간 하루 6시간 파트타임 임시직인 셈이다.


옆에서 보던 일이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흔쾌히 하기로 했다. 돈을 내면 그 값에 맞는 기계용 토큰으로 바꾸어 주면 되고, 자신의 전용 배트를 가져오지 않았으면 아이디를 받고 원하는 사이즈의 야구방망이를 빌려주면 된다.


아파서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어 그런지 순발력이 떨어져서 첫날은 실수로 손해 보는 장사를 두어 시간 했다. 20달러어치 토큰을 달라는데 두 배의 코인을 주고, 10달러 낸 이에겐 20달러만큼 토큰을 주어 수십 달러 손해 본 후 아차했다. 머리를 안 쓰고 살았더니 그나마의 지능도 떨어졌나 보다. 두 배수의 곱셈을 못하고 버벅대다니, 치매가 시작되려나 잠시 우울했다.


마침 봄방학 기간에다 야구시즌이 시작되어 몹시 바쁘다. 사무실에서 일할 땐 숫자만 들여다봤는데, 돈을 직접 만지니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돈을 또 세고 또 센다. 돈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속물이 된다. 현찰의 매력(?)에 빠지는 재미에 장사를 하나보다. 예전엔 하루를 마감할 때 매상에서 조금씩 떼어 비자금을 만든 적이 있었다. 벨벳으로 만든 양주주머니에 알토란 같은 내 돈이 수월찮게 있었다. 그때의 밥 안 먹어도 배불렀던 뿌듯한 기억을 잠시 추억했다. 아픈 뒤 딴 주머니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전부터 오던 고객을 오랜만에 만나니 리틀리그 선수가 이젠 청년이 다 되어 아빠보다 커 있다. 세월이 빨리 지남을 실감했다. 아이디를 되돌려 줄 때 남자들은 대부분 'Ugly one!'을 달라며 겸손하다. 여성들은 예외 없이 여러 아이디 중 'most pretty lady!' 'Prettiest one'을 달라고 한다.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의 다른 어법은 여전하다. 30년 전에 와서 연습했던 꼬마는 결혼해서 아이손을 잡고 드나드는 곳. 오랜만에 오니 활기롭고 건전한 사업장인 것이 참 감사하다. 거리를 두었다 보니 예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란 시구처럼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눈이 떠진 듯하다.


돈 버는 목적만 가지고 보던 예전엔 귀찮기도 했던 사업장이 이젠 감사하고 소중하니 말이다. 이번엔 주인 입장에서 좀 더 나은 서비스 하느라 공짜 물과 음료수를 많이 쏘았다. 원칙 없이 그러면 나중에 직원들이 일하기 나쁘다며 좋은 일하고 남편에게 지청구 들었다. 그래도 건강이 나아져서 일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여전히 오는 단골손님들도 감사하고, 좋은 날씨가 계속되니 야외연습장인 일터가 바빠서 또 감사하다.


직원들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을 청소하고 주의사항 포스터도 정비하고, 두고 간 옷이며 소지품을 'lost and found'에 정리해 놓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러 온 갈매기가 끼룩대는 봄날의 오후. 문을 열어 놓으니 바람도 부드럽다.


딴 주머니의 욕심을 움켜쥐고 있었더라면 쓸데없는 낭비로 허송세월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몰랐을 소소한 삶의 행복을 이제 느낀다. 아프길 잘했다. 내려놓길 잘했다.



작가의 이전글 비극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