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 여행
[이 아침에]우당탕 결혼기념 여행
[Los Angeles]미주 중앙일보
입력 2025.06.04 04:39
다리가 부실해서 오래 걷기가 힘든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남편이 결혼기념여행계획을 짜면서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서 무심히 ‘스위스’라고 했다. 그 대답에 코가 꿰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지나 스위스 인터라켄까지의 길고 복잡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남편을 외삼촌이라 부르는 시댁조카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고, 고모부라 부르는 친정조카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서 인사하고 교제하고 그 아이들의 피앙세도 면접(?)하고 오는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니었다. 직항으로 목적지에 가서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도 힘든 몸이 비행기와 기차와 우버를 번갈아 타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전동 스쿠터를 가져가서 큰 도움이 되었다.
아들아이가 여행코치처럼 자세히 예약을 해주고 코스를 안내한 길로 두 시니어가 착실히 따라다녔어도 변수는 있는 법.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 고흐뮤지엄 현대미술관들이 모여있는 그 멋진 장소 뮤지엄 스퀘어에서 대자로 눕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약간의 턱이 있는 곳을 평지인 줄 헛디뎌서 다리 허리부터 마지막 머리까지 도로에 부딪혔다.
친절한 시민들과 구경꾼들에 싸여있다 일어나려니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망신살이 뻗친 날. 예수승천공휴일이라 인파가 더 많은 날, 나도 예수님 따라 승천할 뻔했지 뭔가? 동행한 이들이 김샐까 봐 타박상이어서 다행이라며 괜찮다고 일행을 독려하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진짜 뻗었다.
그날은 스쿠터의 파트 하나가 고장 나서 남편은 하드웨어 스토어를 들락거리며 고친 진땀 난 날이기도 했다. 미래의 조카사위인 팀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 고마웠다.
네덜란드에서 일을 다 본 후엔 비행기로 취리히까지 와서 스위스 열차로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호텔 방 창문으로 차원이 다른 맑은 찬 바람이 훅 들어온다. 발코니에 앉으니 멀리 만년설이 덮인 두 봉우리가 보인다. 두부 자른 듯 보이는 만년설봉우리가 융프라우라고 한다. 산중턱 마을은 녹음 울창한 여름이고 만년설이 녹은 아레강이 흐르고 하늘엔 알록달록 패러글라이더가 떠 다닌다. 거리엔 관광마차의 말발굽소리가 따그락 따그락 들린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관광객들도 차분하다. 중국인들도 꽤 만났는데 그들조차 조용했다. 분위기를 타나보다. 힐링이 절로 되는 이곳에 오려고 우여곡절을 겪었나 보다.
돌아보니 결혼 45주년 우리의 역사도 순탄한 길 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정을 위해 함께해 온 사랑과 헌신에 서로 감사할 일이다. AI에게 물어보니 결혼 45주년은 '홍옥혼식' 또는 '명주식'이라 한단다. 이 날에는 루비나 비단과 같은 홍옥을 선물하거나, 명주로 된 선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홍옥대신 홍옥색 스위스제 불파스를 타박상에 도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