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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Sep 13. 2017

BS/AS 수술전, 수술후

새들에게 배우다


                               

 BS/AS


이정아 : 수필가

한국에 와서 병원 진료를 받는 동안 머무르는 숙소는 분당 정자동의 오피스텔이다. 숙소의 큰 통 창으로 탄천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잿빛개울이라는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이름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산책로로 안성맞춤이다. 징검돌이 놓인 사이로 팔뚝만한 잉어가 몰려다녀서 오리와 두루미 온갖 물새들의 집합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도 날개 끝에 검정 바이어스를 두른 흰색 두루미와 검정 날개를 펼치면 독수리처럼 위용 있는 재두루미가 모래톱으로 마실 나왔다. 멀리서 보면 우아해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물속에 머리를 넣다 빼며 외다리로 서서 분주히 먹이를 찾느라 바쁘다. 들고 있는 한 다리는 먹이가 오면 덮치기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동물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오직 동물이 겸손해 질 때는 먹이를 위해 고개를 숙일 때라고 한다. 먹을 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에는 없는 ‘체면’이라는 것을 중시하기에 겸손해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 앞에 숙이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고개를 숙이면 무시당할까 겁이 나서일지 모른다. 잠재된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라고 들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아져야하고, 낮아진 후에야 그 반동으로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한 수를 탄천의 온갖 물새를 보며 배운다. 힘차게 날던 새도 때가 되면 땅으로 내려오고, 울울 청청 하던 나무들도 때가 되면 잎을 떨어뜨린다. 높은 곳에 올라서 영원한 게 무엇이 있던가? 사람도 언젠가는 마침내 흙과 섞이게 마련이고 거름이 되어 자연으로 회귀하지 않는가 말이다.

인류의 역사가 BC/AD로 나뉜다면 나의 인생은 BS/AS로 구분해야 한다. BS(before surgery 수술 전) 와 AS(after surgery 수술 후)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얼마전의 신장이식 S를 말하는 것이다.

돌아보니 바보짓은 모두 BS시절의 일이었다. 자고가 넘쳤던 교만의 시절이다. AS 에는 수술시의 고통과 고독의 경험이 약간의 심적인 변화를 준 듯하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개인적인 것은 더러 포기하게 되고 타자를 조금 더 수용하는 여유가 생겼다. 아프고 나서 인생의 팁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아파봐, 얻는 게 있을 거야.” 하고 싶지만 건강한 이들에겐 저주로 들릴까봐 조심하는 중이다.

남편에 대한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수술전엔 적지 않은 나이에 과잉운동증후인 듯한 남편이 못마땅했다.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먹는 것도 우스웠다. 건강에 대한 설교를 펼치면 "오오, Jesus Lee 당신이 다 옳아" 라고 놀리며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선견지명으로 내게 신장을 기증해도 될 건강을 유지 한 것이 고마워서 이젠 존경 모드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같은 학번 이지만 월상의 마누라에게 구박받던 처지가 천지개벽한 셈이 된 것이다.


높은 곳에 떠 있기 위해서는 뱃속을 비워야 한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낮고 가벼워야 하리라. 굳이 아프고 나서 깨닫는 어려운 길을 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되도록 빨리, 허영심에 가득한 자아와 세상의 순리가 만나 조화를 이루길 바란다. 이 말은 아직도 아픈( 덜 깨어진) 내가 나에게하고 싶은 말이다.

BS/AS 로 나는 좀 더 낮아지고 남편은 인생역전이 되었다.



 
선수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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