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저장소 넓히기

Delete 과잉기억

by 이정아


좋은 기억만 남기기로 해요


이정아/수필가


오래전 의학저널에 실린 여성의 사례를 읽었다. 32권의 일기장을 간직하고 있는 그 여인은 아주 어렸을적 일들의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한단다. 연구팀이 일기장과 대조해 보니 다 맞았다고 한다. 너무 기억력이 좋아 '초능력자'라는 말도 들었지만 날이 갈수록 너무 많은 기억력으로 인해 생활이 불편해졌다며 의사와 상담을 한 것이다. 연구팀은 그녀의 증상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tic Syndrom)' 이라 칭했다고 한다. 실험중엔 'AJ' 라고 불렸던 그녀는 후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라는 책을 낸 Jill Price

이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흡사하다. 아주 오래된 일들이 마치 사진 찍어 놓은 듯 상자 속에 차곡차곡 있다가 나오는 것이다. 여고 동창들은 내가 가진 자신에 대한 기억을 무척 놀라워한다. 기억을 풀어내면 손뼉치며 "그래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하며 좋아한다.

이를테면 곱슬머리 Y가 새로 지은 도서관 유리문을 뚫고 나오려다 출입문이 깨졌다는 둥. 시청각실의 커튼 사이로 담장 너머 미 대사관 가족들의 선탠 모습을 엿보다가 걸린 P의 이야기. 미담보다는 망신 사건들이지만 곱씹는 재미가 크다. 남편의 동창 J선생도 자기 학교의 일을 남편보다 내가 더 잘 기억한다면서 감탄한다. 돌아보니 쓸데없는 기억을 남보다 잘하는 것으로, 그 부분의 뇌용량을 공부에 썼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한다.

선행보다는 가십이 더 흥미롭고 기억에 남으니 아마도 남들은 나를 통해 씹는 카타르시스를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창회나 문인모임, 교회의 구역예배나 친교시간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내 '과잉기억증'의 팬심들이 주변에 모인다. 가끔 내 기억력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부정한 일을 도모하거나, 거짓 학력이나, 가짜 등단, 표절 등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이곳 문단에 속한 후 30년 가까운 대소사를 거의 기억하니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내 기억 속에서 자신의 챕터를 지우고 싶은 것이다. 기억력 때문에 본의 아닌 악역을 담당하는 셈이다.

지난 주 문단을 잘 아는 분과 이야기 중, 이곳의 한글문학도 세대가 지나면서 끊길 텐데 그 역사를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내가 쓴다면 흑역사나 야사 쪽일 터여서 대답이 어려웠다.

감사의 계절을 맞아 내게 지우개 하나 있으면 좋겠다. 옐로페이퍼에나 나옴직한 이야기나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다 지워버리고 즐겁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감사만 넘치게 살고 싶다. 나쁜 기억은 오래 가고 감사할 기억은 쉽게 잊는 것이 보통 사람이다. "악마는 감사를 모른다"는 신학자 마틴 루터의 말을 빈 감사주일 설교를 들었다. 인간답게 살려면 감사하며 살아야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건강한 기억의 조건 중 하나는 적당한 건망증"이라고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에서 일찍이 설파하였다. 좋은 기억 저장소를 넓혀 감사하며 살려면 나쁜 기억의 삭제는 꼭 필요할 터이다. 좋은 절기에 좋은 기억만 하고 감사하며 그 감사를 나누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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