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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May 21. 2018

철이 넘치는

5월의 신부



이정아/수필가
    
둘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진 '부부의 날'은 5월 21일이다. 미국에선 1981년에 생긴 세계 결혼기념일을 한국에선 부부의 날로 고쳐 200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오래전 5월 21일, 그 날은 음력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 공휴일이었고, 남편의 생일이었으며, 우리 결혼식날이었다. 나는 나름 우아한 5월의 신부였다.

그 며칠 전 광주항쟁이 발발하여, 여파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지근거리인 태평로의 신문회관이 예식 장소였는데, 신문사에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어쩌면 혼인예식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다. 며칠간 마음을 졸이다가 장갑차가 신문회관 정문에 서 있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헌병들의 엄호는 결혼식을 보호하려던 게 아니라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프레스센터를 지키려던 거였다.

얼마 전 아는 분 댁 혼사에 참석했다. 듬직한 신랑과는 달리 신부는 명랑 쾌활하고 잘 웃고 말도 잘했다. 우리 땐 결혼식의 신부는 조신하고, 결혼식 분위기는 경건한 것이 보통이었는데 격세지감이다. 신부의 들러리들도 철없어 보이긴 마찬가지여서 단체로 루스한 원피스에 앵클부츠를 신었다. 도무지 얌전이나 경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힙합 음악에 맞추어 피로연장으로 입장한다. 손가락 동작과 함께 "A-Yo! "이러면서. 그게 콘셉트였는지 몰라도 내 눈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번잡하고 어수선했다. 옆의 하객에게 신부 나이를 물어보니 24살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24살이 무슨 철이 있겠나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랬더니 남편 말이 우린 둘 다 24살에 결혼했다나.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깜짝 놀랐다. 쌍으로 철없는 꼴불견이었겠다 싶은 게 낯이 뜨거워졌다. 남의 말을 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이날 이때껏 나는 우아한 5월의 신부였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철없는 5월의 신부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보면, 기억력을 상실한 이가 잊어버린 나를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나를 스쳐 지나갔을 것 같은 인물과 장소를 찾아가서 과거의 나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해가 쉽지 않아 여러 번 읽은 그 책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당시와 꼭 같은 인물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비슷한 체험을 하는 이를 통해 나의 과거를 조명해 볼 수 있었다.

40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여선생과 특례 보충병으로 군대 대신한 직장에 다니는, 두 철부지의 결혼을 양가 모두 왜 반기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능력이 전무한 애들이 결혼을 한다니 부모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나를 돌아보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고 나서 비로소 철이 든 듯하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알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목표와 방향만 같으면 장애물이 있어도, 둘이 힘을 합쳐 극복할 수 있었다.
 
세월이 가면 철부지 후배 신부도 절로 철이 들 것이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오래전 5월의 신부였던 그녀는 인공관절 수술로 철심까지 넣어 이제는 철이 넘칠 지경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흥흥.


05212020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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