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 교도소가 많은 이유

까란지루 111명 학살사건

by 손정수

111명이 학살당했다. 물론,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로 볼 수 있다. 살인자는 경찰, 학살당한 사람은 수감자. 당연한 것 같지만 도망칠 수 없던 감방 안에 가둬두고 총질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의가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개하는 비극 까란지루를 소개한다. 지금도 상파울루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나오는 길목이자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오는 중간 지점에 교도소가 몇 있다. 외국에서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생소하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도 잘 모르는 교도소. 왜 이곳에 생겼을까?


원래는 시내 북부에 위치한 까란지루에 있던 큰 교도소가 있었다. 수천 명을 가둬두는 곳. 근데 1992년 학살 사건으로 재소자를 소규모로 나눠 가두고 일부 교도소를 민영화하며 생긴 것이다. 까란지루(carandiru)는 상파울루 시내 북부에 위치한 동네 이름이다. 상파울루 치안국은 1890년도 발표된 새 형법에 따라 수감자에게 재활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새 교도소를 만든 것이다. 원 모델은 프랑스의 Centre pénitentiaire de Fresnes 교도소를 본떠서 Giordano Petry 건축가가 설계했다.


수년간 진척이 없다가 당시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Ramos de Azevedo에 의해 1920년에 완공된다. 엄청난 비용과 정성을 들였는데 일반 교도소 건축비에 14배에 달하는 비용과 모든 자재를 수입해서 건설했다. 초기에는 1,200명을 정원으로 건설됐으며 1940년대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의 재활시설로 알려지기도 했다. 외국 유명인사나 귀빈들이 상파울루에 오면 꼭 들려 구경하던 곳이기도 하다. 청바지를 만든 유명한 Claude Lévi-Strauss도 찾았다고 한다.


1936년 정신분석 학파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친구이자 학자인 Stefan Zweig 박사는 까란지루 시설을 방문한 후 "깨끗한 환경과 공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죄수들이 빵을 직접 굽고, 약을 만들고, 농장을 재배하는 등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곳"이라고 극찬했다. 상파울루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좋은 시설로 칭찬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를 넘어서며 당시 군사독재였던 연방정부의 개입으로 많은 정치범을 수용하며 정원을 초과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6년 정원을 3,250명으로 늘리는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이 공사는 원 건물 형태를 변형시키고 주변 환경이 파괴하여 한순간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뀌게 된다. 한때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하던 1990년대에는 8천 명까지 들어서는 등 최악의 교도소로 변한 것이다. 처음에는 초범과 정치범을 수용하던 모델에서 점차 온갖 잡범을 수용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중에서도 70년대부터 자생하기 시작한 범죄단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불법 생활이 늘었다. 특히 마약류의 반입은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마약 판매와 각종 이권을 두고 조직들이 서로 싸우는데 매일 같이 피를 흘렸다.


교도소를 운영하는 주 정부에서도 적은 예산으로 운영하다 보니 만연한 부패. 부정이 발생했다. 가끔 교도소를 뒤지면 칼은 물론, 총기 등 각종 무기와 마약이 나온다. 이런 것이 반입되는 방법은 여러 루트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허가받은 가족 면담 자리에서 빵 사이에 끼워 받기. 다른 물건 속에 넣어 위장하여 배달받기 등 생각한 것 이상으로 쉽게 많이 들여왔다. 적은 월급을 받는 교도관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주며 무기나 마약을 반입하라 시킨 경우도 있었다. 만약 안 하겠다 하면 가족을 위협하는데 그럼 배달해야 했다.


수십 년간 방치된 건물 그리고 열악한 환경. 까란지루 교도소는 빗물이 들이치고 낡은 건물로 환경이 비참했다. 6명이 들어갈 방에 수십 명이 들어가 있었고. 잠을 자기는커녕 조직들의 싸움에 허구한 날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총 9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 건물에서는 다시 경범죄자. 중범. 강간범 등 죄수의 특징에 따라 나누어져 있었다. 정신병자를 따로 관리하는 곳, 마약중독자 관리, 에이즈 환자 등. 이곳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근무했던 의사는 지옥이 따로 없다고 표현했다. 항상 터질 것 같았던 이곳에 드디어 전운이 돌았다.


1992년 10월 2일 다른 조직원 두 명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금세 조직싸움으로 번졌고 대대적인 집단 난동으로 변했다. 간수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를 하며 요구사항을 전한다. 이런 일들은 자주 있는 일이었고 한 번 일어나면 정부와 협상해서 필요한 사항 즉, 환경개선이나 물품을 받고 풀어주는 게 단계였다. 그런데 이날은 다른 날과 달리 당시 주 군경 총책임자였던 Ubiratan Guimarães 대령이 특공대 출동 명령을 내린다. 평상시와 달리 교도소에 특공대가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에 죄수들은 무기를 모두 창문으로 버리고 투항했다.


이들의 원래 목적 또한 시설개선이나 편의를 주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찰과 싸우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들어온 경찰특공대는 무차별로 쏴 죽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무장 진압을 시도한 군경은 무려 111명의 죄수를 학살했다. 학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 방에 갇혀있던 자, 손발이 묶여있던 자, 하여간 상관없이 모두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즉 싸우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몰아넣고 쏴 죽인 것이다. 내가 20세 전이라 이때의 뉴스와 사진은 생생히 기억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아직 그때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차마 공유하지 못하겠다.


폭동이 일어나자 수감자 가족은 걱정되어 교도소로 몰렸다. 경찰은 기자와 가족의 접근을 막았다. 그 후 몇 시간에 걸친 학살로 정식으로 111명이 죽었다고 보고한다. 조직끼리 서로 죽였다, 경찰과 싸우다 죽었다고 보고했는데 믿기지 않는 현실에 모두 충격에 빠졌다. 111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당시 살아남은 증인은 그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연고자 없이 수년간 갇혀있던 죄수들은 집계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 소식은 당시 세계적인 뉴스를 타기도 했다.


이런 끔찍한 교도소를 지워 버리고자 주 정부에서는 2002년도부터 차츰 허물기로 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교도소가 위험하기에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게 된다. 브라질은 물론 세계적인 충격을 준 이 사건은 2003년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시 오스카상 외국영화에 도전했는데 후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관심을 받기는 했다. 지금도 유튜브를 보면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아 그리고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프리존 브레이크 시즌 3 에피소드들은 이 까란지루 교도소를 모델로 스토리를 구성했다고 한다.


그럼 왜 그 당시 이런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먼저 경찰 진입을 명령시킨 Ubiratan Guimarães 대령은 준비되지 않은 채 경찰을 진입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특히 총기 사용을 허가했고 진압보다는 사살에 더 중점을 둔 작전을 계획한 것으로 나타났다. Ubiratan 대령은 2001년에 열린 재판에서 당시 Antonio Fleury 주지사로부터 빨리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즉 명령을 따랐다는 것인데 총 632년의 형을 선고받은 Ubiratan 대령은 정작 2002년에 주 의원에 선출된다.


주 의원 임기인 4년간 형 집행이 중단되었다가 2006년에 주 법원 항소심에서 무혐의를 받아 풀려났다. 물론 당시 이 항소 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런 대령도 끝은 좋지 않았는데 바로 2006년 9월 10일 집에서 총에 맞아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범인과 싸운 흔적이 없고 뒷문이 열려 있어 아는 사람의 소행으로 보고 먼저 여자 친구의 소행으로 봤다. 그러나 재판에서 여자 친구는 무죄를 선고받아 이 사건은 현재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다.


당시 주지사였던 Antonio Fleury는 탄탄한 정치 길이 열렸었는데 이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또한, 당시 학살에 가담한 군경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는데 폭동으로 죄수들이 서로 죽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Pedro Franco de Campos 전 상파울루주 검사는 Ubiratan Guimarães 대령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라고 명령했다며 당시 상황에서는 필요한 결정이었고 결정은 옮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총 80명의 군경 중 23명의 재판이 몇 년 전 결판났다. 이들은 당시 교도소 1층에서 사살된 15명 중 13명을 죽인 것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여기서 각기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모두 항소했는데 구속되려면 아직 갈 길은 멀다. 철저한 살해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재판하는데 2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걸린 것도 답답하고 이 사건이 점차 잊혀 가는 현실이 두렵다. 요즘 세대는 잘 모르는 까란지루 학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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